지난 8월 28일 KBO(한국야구위원회)리그의 올해 누적 관중이 900만명을 돌파하던 날,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히어로즈와 삼성라이온즈 경기를 '직관'했다. 하루 전에 인터넷을 뒤져 겨우 표 한 장을 구했다. "삼성의 이재현~빼뱀"이라며 흥겹게 시작되는 양 팀의 응원가와 파도치는 함성으로 경기 내내 록콘서트에 온 듯했다. 다소 주춤해진 K팝 열기가 고스란히 야구장으로 옮겨 왔다. 관중들은 코로나19 암흑시대에 당했던 '억압'을 야구장에서 응원과 함성을 통해 '해방'으로 치환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올해 KBO리그는 610경기 만에 900만 관중을 돌파했고, 9월 말까지 720개 정규경기를 다 치르고 나면 1000만 관중 돌파는 시간문제다. 역대 최고였던 2017년(840만688명) 기록은 가볍게 제쳤다. 8월의 유례없는 폭염도, 한국이 선전한 파리올림픽도 국내 야구장의 뜨거움을 압도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주말에만 북적였으나 지금은 평일도 매진이 일상이다. 한국신용데이터에 따르면, 국내 야구장 인근 외식업 매출은 지난해보다 23%가량 올랐다. 허구연 KBO 총재는 "세계가 깜짝 놀라는 우리 야구 팬들의 뜨거운 응원은 KBO리그의 자산이자 자랑"이라며 "프로야구는 모든 세대를 어우르는 국민 스포츠·레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7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는 KIA타이거즈, 왕조시대의 부활을 노리는 삼성라이온즈, 2연패(連覇)를 꿈꾸는 LG트윈스가 상위권을 형성하고 두산베어스·KT위즈·한화이글스·SSG랜더스·롯데자이언츠가 가을야구 탑승을 위해 각축을 벌이며 팬들을 모은다.
필자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매년 야구장을 찾았지만 당시에는 10~30대 여성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빼고 프로야구 얘기를 하기 어렵다. 야구 룰은 잘 몰라도 괜찮다. 함께 소리 치고 치맥을 먹으면서 야구를 신나게 소비한다. 마치 아이돌그룹 만난 듯 응원한다. 당연히 관련 굿즈(Goods)를 구입하며 만족감을 얻는다. 필자 같은 '꼰대' 팬은 안방에서 TV 중계를 보며 투수 구질, 타자 스윙, 수비 동작을 꼼꼼하게 즐긴다. 하지만 야구장에서는 그런 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저 사방팔방 뻗어가는 야구공의 궤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함을 느낀다.
프로야구를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업종으로 분류하자면, 올해 국내 경제계에서 이렇게 대박을 누리는 업종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런 흥행을 일으켰을까. 아마 일반 기업이나 공공 조직에서 마케팅을 위해 참고할 포인트가 있어 보인다. 대략 7개만 꼽아 보자.
1경영환경이 최악이라도 얼마든지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프로야구는 시즌 초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다. 지난해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은 예선에서 탈락했고, 일부 선수들의 음주 논란이 터졌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KIA 김종국 감독이 불명예 퇴진했다. 게다가 모바일에서 무료로 보던 야구중계가 유료화되면서 KBO리그 흥행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과거에는 국제 스포츠 행사가 열리면 프로야구 흥행에는 악재였으나, 올해는 파리올림픽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2 주력 상품이나 간판스타는 언제나 마케팅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점이다.
올해 KBO리그를 흥행시킨 선수로는 우선 한화 류현진(37), KIA 김도영(20), 삼성 김영웅(21)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인천고를 갓 졸업하고 올해 KBO리그 최고 마무리투수가 된 두산 김택연(19)도 빼놓을 수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78승을 거두고 12년 만에 고향팀으로 복귀한 류현진을 직접 본다는 팬들의 설렘과 호기심이 컸고, 이는 관중 동원으로 이어졌다. 1만2000명을 수용하는 한화이글스 구장은 9월 3일로 '금년도 매진 43회'를 기록했다.
KIA 김도영은 올해 가장 유력한 MVP(최우수선수)다. 9월 4일까지 타율 3할4푼4리(3위), 167안타(4위), 35홈런(2위), 98타점(6위), 36도루(6위), 126득점(1위), 출루율 0.419(3위), 장타율 0.645(1위), OPS(출루율+장타율) 1.064(1위) 등 타격에서 고루 빼어난 성적을 올리고 있다. 광주동성고 시절부터 호타준족(好打駿足)으로 '제2의 이종범'이라고 불리던 야구천재였다. 하지만 프로에 들어와 2년간 부진을 겪다가 드디어 원래 실력이 나왔다. 투수의 공을 마지막까지 최대한 지켜보다가 벼락같이 휘두른다. 체중을 늘린 데 힘입어 장타력까지 좋아졌다. 이미 최연소 '30(홈런)-30(도루)' 기록을 달성했고 '40-40'도 가능해 보인다. 1루타→2루타→3루타→홈런을 차례로 치는 '진짜' 사이클링 히트도 기록했다.
KIA에 김도영이 있다면, 삼성에는 김영웅이 있다. '노래는 임영웅, 야구는 김영웅'이란 구호처럼 입단 3년 차인 김영웅은 올해 삼성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배트를 길게 잡고 젓가락 휘두르듯 풀스윙하는 타법으로 무려 25개의 홈런을 날렸다. 간절히 점수를 바라는 상황에서 터진 김영웅의 홈런은 그의 스타성을 더욱 높였다. 구단은 지난 7월 27일 대구 경기를 '김영웅 데이'로 명명했다. 경기 전 팬사인회는 인산인해였고 김영웅은 부모님과 함께 시구·시타·시포 행사도 가졌다.
3마케팅의 핵심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20대 여성을 붙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K팝 열기가 주춤한 사이, 야구장은 20대 여성의 대중문화 플랫폼으로 정착했다. 최근 KBO가 200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를 한 결과, 프로야구 신규 관람자 가운데 여성이 48.6%였고, 연령별로는 20대가 31.4%로 가장 많았으며, 미혼이 절반(53.2%)을 넘었다. 결국 올해 프로야구 흥행은 경기장을 처음 찾은 20대·미혼·여성이 주도한다는 결론이다.
20대 여성 팬의 증가를 프로야구 온라인 중계권 변화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동안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시장에서 프로야구 콘텐츠는 상당한 규제가 있었다. 하지만 올해 연간 450억원의 프로야구 온라인 중계권료를 낸 티빙(TVING)은 개인의 콘텐츠 가공을 허용했다. 1분 안팎의 재미있는 숏폼(Short-form) 영상들이 대세를 이루며 프로야구 붐에 일조했다. 친구나 애인끼리 영상을 공유하면서 "야구장에 함께 가자"라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노드스트롬백화점 베시 샌더스 부사장은 "고객이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의미있는 서비스만이 중요한 서비스"라고 말했다. 여기에 맞춰 KBO는 팬 숏폼 콘테스트도 진행할 예정이다. 또 KBO리그 공식 유튜브는 올 상반기 구독자가 10만명 가까이 늘었고 총조회수도 222%나 증가했으며, 각 구단도 경쟁적으로 다양한 SNS 콘텐츠 제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함께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에서 스케치북 글자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야구장에도 도입되면서, 이제는 너나없이 스케치북을 들고 입장한다. '포기하지 마 우리도 너네 포기 안 했잖아' '응원가 끝나기 전에 죽지 마라 노래 좀 부르자' '레이예스(롯데) 여권압수' 등의 문구가 매일 방송 카메라를 통해 비치며 붐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한 소녀가 만들었던 '할아버지는 이만수, 아버지는 이승엽, 나는 구자욱'이라는 스케치북 문구를 프로야구 초창기 홈런왕이었던 이만수 전 SK와이번즈 감독이 보고 자신의 블로그에 감상문을 올리기도 했다.
상대방 선수가 삼진을 당했을 때 KIA 이주은 치어리더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추는 '삐끼삐끼' 춤 영상은 뉴욕타임스에까지 소개되었다. 10개 구단마다 치어리더들의 응원 아이디어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관중을 끌어들이는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4 자회사나 자매회사의 우수한 실적이 본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올해 프로야구 붐에 간접 기여한 것은 '최강야구'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이다. 원래 야구 은퇴 레전드들이 펼치는 경기로, 야구와 예능이 50 대 50으로 섞여 있다. 야구를 모르던 젊은이들이 '최강야구' 프로그램을 통해 야구를 접하고, 야구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최강야구 팀과 상대했던 팀 선수들은 이 프로그램을 프로야구 진출의 등용문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키움에서 뛰는 고영우(23)와 원성준(24), 롯데에서 각도 큰 슬로커브로 타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정현수(23)가 모두 최강야구 출신이다. 최강야구 팀의 주장인 박용택 KBS 해설위원은 "남성만 보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10대 여학생부터 70대 할머니까지 모두 재미있게 보면서, 그 열기가 자연스레 프로야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5 고령자의 노하우를 무시하지 말고 잘 살려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 프로야구는 40세 전후의 스타들이 경쟁적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미 은퇴를 선언한 SSG랜더스 추신수(42) 외에도,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시속 147㎞ 강속구를 던지는 삼성 오승환(42), 괴력의 홈런포로 팀의 선두를 이끄는 KIA 최형우(40), 사상 최초 2년 연속 30홀드를 기록한 SSG 노경은(40), 주전 포수로서 종종 4번 타자로 출전하는 삼성 강민호(39), 최근 통산 400호 홈런을 날린 삼성 박병호(38) 등은 지금도 팀에서 변두리가 아니라 주연이다. 20대와 40대가 함께 뛰는 모습에 팬들은 열광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전망이다.
6 투명경영이 바로 고객 확보의 지름길이라는 점이다.
'공정'을 핵심가치로 여기는 젊은 세대는 올해 도입된 ABS(Automatic Ball-strike System·자동투구판정시스템)를 좋아한다. 오심(誤審) 논란이 잦았던 심판의 재량을 배제하고 기계가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단하는 ABS는 한국이 메이저리그보다 먼저 도입했다. 초반에 일부 선수들의 불만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착 단계다. 또 10년째 접어든 비디오판독(VAR)이 일상화되면서, 과거 심판 판정을 놓고 시비가 벌어지던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라진 점도 관중을 모으는 요소가 되었다. 기업경영으로 말하자면 확실한 투명경영, 클린경영 마케팅인 셈이다.
7 내팽개친 사업부가 효자가 되기도 하므로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삼성라이온즈는 10년 전인 2014년 이맘때 1위를 달리다가 며칠 새 5승5패를 기록하자 난리가 났고 그룹 수뇌부에 '부진원인 및 향후대책'이란 보고서를 올릴 정도로 치밀했다. 결과적으론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우승을 휩쓸었지만, 일시적인 부진도 용납하지 못하고 강하게 독려하는 '삼성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삼성라이온즈는 매각설에 휩싸이다가 결국 제일기획 산하로 들어갔다.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이재용 회장은 "세계 어느 초일류 기업에서 우리같이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곳이 있으며, 설혹 삼성이 우승을 해도 '삼성이 스포츠까지 장악했다'는 말을 듣는데 무슨 이득이 있느냐"며 야구단 운영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 경험이 없는 전력분석팀장이 감독을 맡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 하지만 작년 말 이종열 단장이 취임한 뒤 스스로의 힘으로 2등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삼성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이재용 회장은 직접 구장을 방문할 것이다.
발상의 전환도 했다. 발은 빠르지만 내야 수비가 불안했던 김지찬(23)을 과감하게 중견수로 배치한 것이 적중했다. 김지찬은 93%의 도루 성공률을 자랑하는 빠른 발로 서너 개의 환상적인 수비 모습까지 연출했다. 수비가 안정되면서 타격도 3할대를 유지하고 있다. 작고 귀여운 외모까지 겹쳐 김지찬은 팬들에게 특급 스타가 되었다. 작년까지 스윙만 컸던 이성규(31)는 타격코치의 지도로 올해는 대형 슬러거가 되어 홈런을 21개나 치고 있다. 여기에다 김영웅 외에 이재현(21)·김현준(21)·윤정빈(25) 등 꽃미남 20대 '영건'들도 팬 몰이의 주역이다. 9월 4일까지 삼성라이온즈는 관중 숫자가 122만7022명으로 10개 구단에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2만4000명을 수용하는 관중석도 25회나 매진됐다.
하지만 프로야구 1000만 관중 시대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열기에는 반드시 명(明)과 암(暗)이 존재한다. 지금의 열광적인 프로야구 붐은 야구 실력 자체가 높아졌다거나 경기력 수준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마케팅 기법이 만들어 낸 효과로 봐야 한다. 언제까지 이벤트와 마케팅에 의존해 프로야구 인기를 이어 갈 수 없다. 삐끼삐끼 춤도, 스케치북 응원도 내년이면 시들해질지 모른다.
그래서 늘 본질인 야구 자체의 실력과 수준을 체크해야 한다. 야구해설자로 유명했던 양상문 한화이글스 코치는 "7회 이후에 역전승과 역전패 경기가 남발하는 것은 팬들에게야 무척 재미가 있겠지만, 정상적인 실력을 가진 리그라면 자주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 '막장'에 가까운 사례가 많다. 1등을 달리는 KIA타이거즈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6월 25일 KIA타이거즈는 롯데자이언츠에 14대 1로 앞서다가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더니 14 대 15로 역전당했다가 연장 12회 끝에 아슬하게 15 대 15로 경기를 마쳤다. 야구 보는 재미는 그만이었지만, 쓴웃음이 나왔다. 7월 31일에는 KIA타이거즈가 두산베어스에 무려 30점을 내주면서 6 대 30으로 패했다. 한 팀이 30점을 얻은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래 처음이다. 5 대 0으로 이기고 있던 경기가 5 대 6으로 뒤집히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1회에 선제점을 낸 팀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철칙 아닌 철칙이 회자되고 있을까. 1등 팀인 KIA가 이 정도인데 다른 팀이야 오죽하랴.
뿐만 아니다. 체력 훈련과 기본기 습득보다는 실전 대응에만 훈련을 집중해서인지, 수준 이하의 실책이 잦고 오래 자리를 비우는 부상이 많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관중과 팬의 마음이다. 기업이 고객과 소비자를 위해 존재하지 고객과 소비자가 기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야구도 관중과 팬을 위해 존재하지 관중과 팬이 야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관중에게 즐거움을, 팬에게 기쁨을 준다면 어떠한 마케팅 노력도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