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 한국 프로야구 " 최초의 사나이 " 이만수

언어 선택

첫번째 , 한국 프로야구 " 최초의 사나이 " 이만수

최고관리자 0 2,024 2021.10.27 05:46
첫번째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사나이’ 이만수

“야구 50년,

나는 행복했다.

이젠 다 내려놨다”

이만수 “ 상패 . 스크랩 절반 이상 버렸다. 새로운 마음의 방이 생기더라 “

한국 프로야구 40년사에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 현 SSG 랜더스 ) 감독이다.

그는 대구상고 ( 현 대구상원고 )와 한양대 ( 78학번 )를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다. 프로야구 개막전 ( 1982년 3월 27일 )에서 MBC청룡 이길환 투수를 상대로 제 1호 안타 , 제 1호 타점 , 그리고 유종겸 투수를 상대로 제 1호 홈런을 기록해 “ 최초의 사나이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1958년생.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 1982년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로 입단, 美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코치, SK 1군 수석코치, SK 2군 감독, SK 1군 감독 역임 / 現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 16년 현역 통산 1449경기 출장. 평균 타율 0.296, 득점 624점, 안타 1276개, 2루타 193개, 3루타 7개, 홈런 252개, 타점 860점한 이력도 빼놓을 수 없다.

1997년 은퇴하기까지 16시즌 동안 통산 타율은 0.296이었다. 6시즌에서 3할 이상을 기록했다. 1997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2000년 1월부터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코치로 활약했다. 2005년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후 국내로 돌아왔다. 2006년 SK 수석코치를 거쳐, 2010년 SK 2군 감독, 2012년 SK 1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4년 이후 국내 야구 현장을 떠났으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 부위원장,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팬클럽 ‘포에버 22’ 회장과의 추억 지난 8월 29일 일요일 이만수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한데 사정이 있어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며칠 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 기자! 제 팬클럽인 ‘포에버 22’의 회장님이 돌아가셔서 그때는 만날 수 없었다”며 고(故) 김애란(향년 57세)씨와의 인연을 털어놨다. ‘22’는 그의 삼성 현역 시절 등 번호를 뜻한다. 이 번호는 현재 영구결번이다.

“전남 목포의 한 여학생으로 경상도 대구의 삼성 선수를 한결같이 응원한 분이었어요.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그 시절, 야유와 눈총을 받으며 광주 무등구장에서 큰 소리로 ‘이만수’를 외치던 여학생이었죠.

섬에서 근무(보건 공무원)했기에 야구장에 오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배 타고 육지에 와서 기차로 갈아타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인천 문학구장까지 달려왔어요.”

이 전 감독은 “비 오던 목포의 장례식장을 찾은 팬클럽 회원들의 큰 울음이 그녀가 얼마나 좋은 누나, 언니인지 알 수 있게 했다”며 슬퍼했다.

― 한결같이 평생을 응원하였군요.
“돌아보면 추억이 너무 많아요. 제가 라오스의 어린 선수들을 한국으로 데려왔을 때 그 먼 길을 달려와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려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전화와 문자, SNS로 계속 소통하다가 10월 6일 인천 송도에서 만났다. SK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팀의 연고지인 인천에서 살고 있었다.

“다음 달, 이사 갑니다. 인천을 영영 뜨는 것은 아니고요. (웃음)집을 정리하면서 보니 방 한 칸이 전부 야구와 관련된 물건입디다. 공, 글러브, 유니폼, 기사 스크랩…. 선수 시절부터 ‘이만수 야구 박물관’ 건립이 꿈이었어요. 이 많은 물건을 짊어지고 다녔어요.

김 기자! 제가 야구를 중1 때부터 50년을 했습니다. 기념될 만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걸 안 버리고 챙겼잖아. 먼지와 곰팡이, 세월에 삭아버린 상패와 기념품, 신문 스크랩을 다 정리했어요.”

― 설마 버리진 않았죠?
“4분의 3을, 절반 이상을 버렸어요. 야구 박물관… 다 부질없다는 걸 느꼈어요. 버리자.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아내마저 ‘보물단지처럼 여기더니 왜 버리냐’고 깜짝 놀라더군요. 분신과 같은데, 야구에 피눈물을 흘렸는데…. 하지만 이제는 버릴 나이도 됐잖아요. 다 버리고 나니 방 한 칸이 새로 생긴 것 같아요. 속 시원합니다. 하하하.”

‘감독님! 속이 상해 술 한잔합니다’ 그는 언제나 성공한 선수였고, 성공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승패의 중심에서 늘 결과론에 휘둘리는 표적이 되었다. SK 수석코치 시절, 김성근 감독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반면 SK 감독 시절, 두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전 소속팀인 삼성에 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삼성 현역 시절, 전후기 통합 우승(1985년)을 빼고 죄다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 SK 감독 시절, 제일 아쉬운 게 뭔가요.
“지나고 보니 아쉬운 게 없어요.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니까. 현장에 있을 땐 앞만 보니까, 넓게 보지 못했어요. 그때는 팀 성적이 안 좋고, 연패에 빠지면 너무 괴로웠어요. 감독실에 앉아 있다가 자정이 넘어 집으로 향했어요. 제가 안 가면 매니저가 퇴근을 못 하니까…. 곧장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는 근처 공원으로 갔습니다.

한번은 말없이 공원을 걷는데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모르는 척하고 지나는데 제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말해요. ‘감독님! 오늘 문학구장에 갔었어요. 속이 상해 술 한잔합니다.’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도망쳤지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데 당시만 해도 전부였어….”

기자는 명장(名將)으로 꼽히는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을 만난 일이 있다. 그도 쌍방울 감독(1990~1992년) 시절, 밥 먹듯이 ‘연패(連敗)’를 들이켠 적이 있다. “‘왜 졌지? 왜 이리 안 풀리지…’ 하다가 시계를 보면 새벽 4시였다”고 고백했었다.

이 전 감독의 말이다. “신앙인이니까…, 신앙이 없었다면 저 같은 성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신앙으로 다 내려놓으려 애를 썼지요.” 감독은 외로운 존재다. 감독은 팀 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을 필요도 가장 경험이 많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감독은 반드시 보스여야 한다. 누구를 주전으로, 누구를 선발로 세우고, 타순을 어떻게 짜며, 번트 사인을 내고, 대타로 누굴 기용할지를 오직 감독만이 결정한다.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오직 감독만이 진다.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져. 희한하게도…”

― 신(神)께 열심히 기도하면 우승할 수 있습니까.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질문이 어처구니없으나, 그 역시 승부의 간절함을 빌었을 게 분명했다. “그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데 하나님은 기도한다고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승부는 모두 제 문제지요. 저 역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어요. 선수 시절,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좌절했잖아요. 그때 선배들이 찾아와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하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어요.

저도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져. 희한하게도…. 이건 아니라는 거지.”

이만수 감독은 “야구를 전파하러 라오스에 가고…, 야구 박물관을 짓겠다고 모아둔 기념품들을 절반 이상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덕분”이라고 했다. “현역 시절, 어디 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경기에서 패하면) 내 인생은 이게 전부라는 생각에 가족에게 화도 많이 냈어요. 남들이 잘나가면 ‘쟤는 나보다 못했는데’ 비교하고….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게 됐어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