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 정동진 감독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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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 정동진 감독과의 만남...

최고관리자 0 1,579 2021.10.29 07:09
세번째

정동진 감독과의 만남
이만수는 대구중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를 너무 못해 한 해 유급까지 했다. “중1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하루 평균 4시간밖에 안 잤어요. 진짜 독하게 야구 했습니다. 별명이 독종이야. 선배가 물어요. ‘만수야. 이렇게 연습하는데 권태기가 안 오냐?’고. 지금까지 권태기를 안 느껴봤어요. 천직인 것 같아. 진짜 야구가 좋고, 야구장에 나가면 신나고, 유니폼 입으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힘이 솟고 그래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함경도,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세요. 아버지는 소위 ‘말뚝 상사’로 직업군인이셨죠. 군인 정신이 투철해서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신조셨어요. 야구를 하다 보면 때로 삼진 먹을 때도 있는데 아버지에겐 용납이 안 됐어요.”
― 심하네요.
“안타를 못 친 날이면 도끼로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찍어버립니다. 무서워 반항을 못 했어요.” 이만수가 대구상고 1학년 시절, 2학년에 김시진, 3학년에 장효조 선배가 있었다. 2학년 올라갈 때 정동진(丁東鎭·75) 감독이 부임했다. 훗날 삼성 코치(재임 1984~88년)와 삼성 감독(1989~90년)으로 다시 만났는데 대구상고 감독 시절, 포수로 눈을 뜨게 한 이가 정 감독이다.

“고교 시절, 그분에게 많이 맞았어요. ‘사랑의 매’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포수셨어요. 늘 소문으로 듣던 분이 감독으로 오시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게다가 제가 포수인데….”

― 어떻게 포수를 하게 됐나요.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와 포수를 번갈아 했어요. 중3 때까지 매일 피칭을 150~200개씩 했어요. 나중에 팔이 펴지지 않더라고요. 남들은 투수 안 시켜준다고 우는데 저는 반대로 투수 안 하고 싶어 울었어요. 그래서 포수로 대구상고에 진학하게 됐죠.”

이만수와 정 감독 사이에 ‘큰 사건’은 정 감독이 부임한 첫날 일어났다. “정 감독님이 학교에서 앞산 충혼탑까지 뛰어갔다가 오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늦어도 1시간20분이면 돌아올 수 있는데 중간에 옆길로 새버렸어. 처음 오셨으니 왕복 시간을 모르실 것으로 생각한 거지.”

‘어떤 선수가 투지가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만수였다’

평균 4시간 밖에 안 잤어요. 진짜 독하게 야구 했습니다. 별명이 독종이야. 선배가 물어요. ‘만수야. 이렇게 연습하는데 권태기가 안 오냐?’고. 지금까지 권태기를 안 느껴봤어요. 천직인 것 같아. 진짜 야구가 좋고, 야구장에 나가면 신나고, 유니폼 입으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힘이 솟고 그래요.”

야구 선수 수십 명이 동네 주택가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택시 기사가 보고서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감독이 누구냐. 애들 운동은 안 시키고 놀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 것이었다.

“3시간 넘게 놀다가 1km 앞두고 열심히 뛰어갔어요. 감독님이 아무 말씀 안 하시고 ‘한 번 더 갔다 와라’ 그러셔요. 그때 들통이 난 것을 알았어요. 1시간 만에 다시 뛰어갔다 왔더니 감독님이 펑고 배트를 놓더니만 ‘엎드려뻗쳐’를 하시며 선수 한 명씩 당신을 때리라는 겁니다. 어떻게 스승을 때릴 수 있어요. 전부 다 용서해달라고 빌었지요. 감독님은 모든 선수가 한 대씩 때릴 때까지 안 일어서겠다고 하셨어요. 한 거야. 해병대 출신이거든.”

당시 대구상고 야구부원은 모두 34명이었다. 정 감독은 34대를 맞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어떻게 됐어요.
“와…, 말도 마이소. 이분이 안 때리면 안 일어날 것 같아서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섰습니다. 3학년 선배가 욕을 하면서 ‘어디 건방지게! 당장 배트 내려놔’라고 했어요. 그러자 감독님이 ‘그래, 만수야. 너가 나를 때리고 일으켜달라’ 셨어요.”

― 악역을 맡으셨네요.
“근데 사람이 그렇잖아요. 슬슬 때려야 하잖아요. 내가 무식해. 그대로 때려버렸는데 감독님이 팬티만 입고 계셨던 거야.” 이 감독에 따르면 당시 선수들은 팬티 10장을 기운 두꺼운 팬츠(일명 ‘슬라이딩 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 팬츠 안에 마른오징어를 넣기도 했단다.

“10대를 때리고 나서 더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모든 선수가 무릎 꿇었어요. 감독님은 아직 24대 남았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다 때렸어요.” 이튿날 스승을 배트로 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재경(在京) 동문회를 비롯한 선배들이 “이만수가 어떤 놈이냐”며 전화와 항의 방문이 이어졌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서울 이모집으로 한 달간 도망쳤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 ‘우리 아들이 생매장 당하게 됐다’고 호소하셨어요. 감독님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어떤 선수가 투지가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만수였다’는 겁니다. 돌아와 감독님께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저는 그 약속을 지켰어요.” “만수야” “만수 형님” “만수 바보”

그는 대구상고 시절 5차례나 전국대회 정상에 올랐고 고3 때인 1977년 청룡기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 타격·타점·최다안타상 등 개인상을 독점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최고의 타격상이던 ‘이영민 타격상’까지 거머쥐었다.

프로에 들어가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83년부터 내리 3년간 홈런왕에 올랐고 83년부터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기록과 11년 연속 올스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1999년 한화 장종훈에 의해 통산 최다 홈런 기록(252개)이 깨지기는 했지만 1986년 첫 100호 홈런, 91년 첫 200호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으로 신화를 썼다. 경기가 끝나면 새벽 2시까지 하루 1000번 이상 배트를 휘두르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1997년 39세 나이로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다시 지도자로서 꽃을 피웠다.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싱글 A팀인 킹스턴 인디언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 A팀인 샬럿 나이츠를 거쳐 2000년 1월부터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코치로 활약했다. 2005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다.

1980·90년대에 팬들은 그를 동네 친구처럼 “만수야” “만수 형님”이라 불렀다. 원정 경기에서 그가 타석에 들어서면 야유와 존경의 뜻으로 “만수 바보”를 외쳤다. 특히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 무등구장에서 유독 심했다. 그럴수록 그가 친 공은 곧잘 하늘을 갈랐다.

“해태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쟁이야. 타석에 들어서면 ‘만수 바보, 만수 바보’라고 관중이 외쳤어요. 은퇴한 후에 10년간 미국에 있었잖아. 그게 그렇게 그립더라고요.

SK 코치로 귀국해 광주구장에 처음 갔더니 다시 ‘만수 바보’를 외쳐요. 선수 때와 느낌이 달랐어요 아! 팬들이 나를 그리워했구나…. 나중에 제가 책을 쓰면 ‘만수 바보’라고 쓰려고 해요. 근데 ‘바보’가 들어간 서명(書名)이 제법 있더라고….”


( 1998년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으로 지도자 연수 갔을 때의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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