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년 전설 '김봉연, 이만수'가 젊은 후배들에게
입력2022.03.18. 오후 5:20
4번 타자 출신 김봉연 전 극동대 교수.(왼쪽), 삼성라이온즈 홈런왕 출신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오른쪽)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와 형님 몇 년 만입니까. 너무 반갑습니다.”
“어이, 이 감독. 잘 지냈어. 얼굴 좋네.”
지난 3월 7일 프로야구 레전드 중의 레전드라는 김봉연(金奉淵·70) 전 극동대 교수와 이만수(李萬洙·64)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서울 서초구 한 식당에서 만났다. 해태타이거즈와 삼성라이온즈 소속으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고 피 말리는 경쟁을 벌였던 두 사람이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82년 3월 27일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삼성라이온즈와 MBC청룡의 첫 경기에서 4번 타자 이만수는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을 기록했다.
해태타이거즈 4번 타자 김봉연이 질 수 없었다. 1982년 원년 홈런왕은 김봉연이 차지했다. 김봉연은 1983년 314바늘을 꿰매는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한 달 만에 극적으로 일어나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고, 1986년 다시 홈런왕에 올랐다.
이만수 역시 1983년 시즌 MVP가 된 데다, 1984년에는 타격 3관왕을 달성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도 차지했다. 1986년에는 누가 먼저 100호 홈런을 칠지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이만수가 선착했다.
김봉연은 프로 7년간 타율 2할7푼8리에 홈런 110개, 이만수는 프로 16년간 2할9푼6리의 타율에 252개의 홈런을 각각 기록했다.
김봉연은 해태 코치이던 1999년 말 기대했던 해태 감독이 되지 못하자 본인 표현대로 피눈물을 흘리며 야구계를 떠났고, 극동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은퇴했다. 이만수는 시카고화이트삭스 코치와 SK와이번스 감독을 마치고 자신의 별명을 따라 헐크파운데이션을 세운 뒤 라오스와 베트남 등 동남아 야구 선교와 함께 재능기부에 주력하고 있다.
- 프로야구 이전 경력을 소개하면.
김봉연(이하 김) “전주중앙초등학교부터 야구를 시작해 전주북중과 군산남중, 군산상고, 연세대를 거쳤다. 농구, 핸드볼, 육상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베이스러닝을 못해서 도루는 적었지만, 직선 달리기는 후배 김일권보다 더 빨랐다. 고교 진학할 때 대구상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랬다면 이 감독의 선배가 되었겠네(웃음).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 신화를 기록할 때 4번 타자였다. 대학 시절 연고전(延高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투수로도 이름을 날렸고, 3연타석 홈런도 종종 쳤다. 그 후 국가대표 4번 타자로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을 비롯해 여러 대회에서 홈런을 치며 국위선양을 했다.”
이만수(이하 이) “대구중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선수 생활 내내 매일 4시간만 자면서 열심히 했다. 중학교 때는 투수도 했지만, 대구상고와 한양대를 거치면서 포수와 4번 타자로 활약했다. 고교 시절인 1977년 청룡기에서 우승하면서 4관왕을 차지했다.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다. 강속구와 슬라이더로 유명한 김시진 투수와는 고교-대학-프로까지 내내 파트너였다.”
- 프로야구 40년을 회고하면.
김 “출범 2년 전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해태가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상처 입은 전라도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1983년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뒤 40일 만에 일어나 첫 홈런을 치고 한국시리즈 MVP 됐을 때가 가장 기억난다. 당시 상처 부위를 숨기느라 콧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이 “1970년대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였는데, 그 바탕에는 애교심(愛校心)과 애향심(愛鄕心)이 있었다. 이를 프로야구의 인기로 잘 연결한 것 같다. 개막전에서 MBC청룡 이길환 투수에게 1호 안타와 1호 타점, 유종겸 투수에게 1호 홈런을 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김 “해태가 1980년대 우승을 많이 했지만, 우리끼리는 당시 삼성이 우승했다면 프로야구가 더 발전했으리란 말도 했다. 오죽했으면 해태 선수들이 삼성 선수들에게 ‘너희에게 질 테니까 우승 보너스 받으면 절반씩 나누자’는 농담까지 했을까. 그만큼 초창기에는 구단 지원이 열악한 데가 많았다. 요즘과는 달랐다.”
- 당시 김봉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이만수 포수가 과도한 입심으로 놀렸다는데.
이 “형님이 워낙 잘 치니까 일부러 약 올리거나 짓궂은 농담을 해서 타격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형님에겐 어림이 없었다. 꿋꿋하게 안타와 홈런을 쳐내더라. 정말 그 파워와 부드러움이 대단했다.”
김 “내 동서와 이 감독의 동서가 오랜 친구여서 가족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 감독이 포수를 하면 온갖 입심으로 방해 공작을 했다. 그래서 심판에게 ‘제발 조용히 시켜 달라’고 항의했지만, 그런 어필 규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 두 분은 어떻게 그리 많은 홈런을 쳤는지.
김 “홈런은 힘만으로 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만기가 홈런왕을 했겠지. 우선 변화구에 적응을 잘해야 한다.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골프스윙이라는 어퍼(Upper)스윙을 많이 했다. 투수 공은 포수 쪽으로 날아오면 궤적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어퍼스윙은 올려 친다. 그러니 배트와 공이 맞는 면적이 넓고 끌고 나가는 시간도 길어진다. 거기에다 공에 스핀을 주는 기술까지 지녔던 것 같다. 그래서 보기에도 장쾌한 큰 포물선의 홈런을 자주 때렸다. 처음에는 중견수가 ‘마이볼’이라고 외쳤다가 공이 둥실둥실 펜스를 넘어가면 ‘어어’ 하며 놀라워했다.”
이 “형님과 나는 반대다. 어릴 때부터 지도자들이 다운(Down)스윙을 강조하는 바람에 공을 깎아 쳤다. 김영덕, 백인천 등 일본 출신 감독들이 그런 타법을 선호했다. 문제는 배트와 볼이 만나는 임팩트 순간이 짧으니 잘 맞으면 장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었다. 고(故) 장효조 선배는 어퍼스윙-레벨스윙-다운스윙을 모두 했기에 타구가 부챗살처럼 날아갔지만 난 주로 좌익수 쪽으로만 공이 갔다. 아쉬웠다. 돌아보면 늘 찍어 치면서 쓸데없는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다. 발도 느리니 병살타도 많이 쳤다. 첫해 별명이 ‘이병살’이었다.”
김 “병살타를 많이 친 것은 그만큼 타구 속도가 빠르다는 말이므로 강타자일수록 병살이 많은 게지. 이 감독은 홈런뿐 아니라 타율도 1위를 기록했으니 대단한 타자였지.”
- 두 분께서는 프로야구 40년 최고 투수, 타자, 수비, 주루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김 “최고 투수는 단연 최동원이다. 선동열은 다소 밀린다. 해태 시절에 자체 청백전을 하면 타자들이 선동열 볼을 잘 쳐냈다. 직구와 슬라이더 치는 요령만 있으면 선동열은 공략이 쉽다. 최동원은 볼도 빠르고 폭포처럼 떨어지는 커브는 일품이었다. 연투(連投)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자로는 롯데 이대호를 꼽고 싶다. 덩치가 크지만 유연하고 일본 가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잘 버텨냈다. 수비는 지금 LG 감독 하는 류지현이 최고였던 것 같다. 김재박보다 나았다. 주루는 이정후 선수의 아버지인 이종범 LG 2군 감독이 최고였다.”
이 “형님이 최동원을 꼽으니 나는 반대로 선동열을 꼽겠다. 최동원은 1958년 개띠 동갑 라이벌이면서도 절친이었다. 최동원과 선동열 둘 다 대단했다. 타자로는 장효조 선배가 최고였다. 수비는 류중일 감독, 주루는 김일권 선배라고 생각한다.”
- 작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문제점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는데.
김 “국내에서 좀 한다는 타자들이 외국 투수들의 정교한 컨트롤과 변화구를 감당하지 못하더라. 타석에서도 한 발을 들고 치는데, 일본의 오 사다하루(왕정치)야 그런 외다리 타법이 가능하지만 보통 선수들은 타이밍을 다 놓친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어느 날부터 발을 들기 시작했다. 공을 맞힐 확률이 적다.”
이 “나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프로의식이다. 사회의 기대는 큰데 행동으로 따라 주지 못하다 보니 지난해 야구인들이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 야구천재 이치로가 미국에 와서 시속 160㎞ 공을 상대하더니 발 드는 걸 줄였다. 지금 국내에선 심지어 2군 선수들까지 모두 발을 드는데, 그만큼 공이 빠르고 변화가 좋은 투수가 국내에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스트라이드(Stride)를 조절해 중심이동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발을 드는 것은 우려스럽다.”
- 프로야구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김 “과거 해태는 김준환·김일권·김성한 등 개성 강한 선수들이 모였지만, 우승이란 목표를 향해 힘을 모을 줄 알았다. 선수 시절에 하루 6시간씩 1000개의 스윙 연습을 하기도 했다. 책임감도 강했다. 반면 요즘 선수들은 개인성적에만 관심 있는 것 같다. 우리 때는 연봉이 3000만~4000만원이었는데, 요즘은 FA로 100억원까지 받는다. 그렇다고 초창기에 비해 야구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투수의 볼넷이 많고 야수의 실수도 잦다. 요즘에는 감독이나 코치가 기합이나 명령은커녕 선수들 눈치를 먼저 본다. 선수들이 왕이다. 그럴수록 스스로 채찍질할 줄 아는 선수가 성공한다.”
이 “초창기엔 전날 저녁 마신 술 냄새를 풍기는 타자들이 가끔 있었다. 프로야구가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요즘 선수들을 보면 웨이트 트레이닝과 러닝 등 체력훈련은 별로 하지 않고 그냥 기술훈련부터 한다. 제대로 뛰지도 않고, 곧바로 공 던지고 방망이 친다. 체력훈련이 적다 보니 하체가 부실해져 부상과 실책이 잦다. 조금만 무리하면 다치거나 인대가 손상된다. 프로 선수들의 평균 키가 182㎝를 넘는다지만 뼈는 부실해졌다. 겉으로만 커졌다.”
김 “죽을 때까지 야구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계발도 해야 한다. 지금 야구계에 거품이 많다. 운동이란 단순노동이다. 그만두었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난 야구 하면서도 영어웅변대회에서 상도 받았고, 고교 시절에 오전수업은 꼭 들었다. 프로 생활 하면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시간 없다는 말은 핑계다.”
이 “사회봉사에도 주목하는 선수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고액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야구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모두가 부러워할 때 다양한 기부나 봉사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했으면 한다.”
김 “이만수 감독이 공을 들이는 베트남 야구 현장을 나중에 같이 가 보았으면 좋겠다.”
진행 및 정리= 최홍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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