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레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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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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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레전드 - 이만수
- 미국생활 -
1998년 미국 프로야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애크런 애로스로 코치 연수를 떠나 199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트리플A 팀인 샤롯트 나이츠의 객원 코치로 지냈으며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팀의 불펜코치를 했다. 2006년 11월 SK와이번스 코칭스태프로 합류 했으며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의 경질에 따라 1군 감독대행을 맡았다.
한국최초의 타격 3관왕 이만수는 전설적인 선수로 기록되는 이유...
이만수는 1984년 타격 3관왕에 오르며 구단으로부터 3년 연속 연봉 인상 상한선 25%를 보장받았다. 어지간한 선수 같으면 대충 경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FA 대형 계약을 한 선수가 이른바 먹튀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이유다. 1980년대 중반은 프로의식이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만수는 달랐다. 연봉 인상 상한선을 보장 받은 3시즌 내내 3할대 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각종 기록 이전에 이만수는 팬에게 최선을 다하는 선수라는 이미지로 각인 돼있다. 이만수는 팬들이 원한다면 팬티 바람에 그라운드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입증했다.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3관왕이란 자부심을 내세울 만하지만 이만수는 후배들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한다. 2006년 자신의 뒤를 이어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두 번째로 타격 3관왕이 된 이대호에 대해서 큰 체격이지만 유연성이 뛰어나고 팔로스루가 좋다 그래서 장타가 나온다며 칭찬했다. 자신이 선수로 뛸 때는 힘 위주의 스윙을 했지만 후배들은 기술로 바탕을 한다고도 했다.
이만수 감독 시절
이만수는 또래 또는 후배들보다 뒤늦게 감독이 됐다. 2011년 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은퇴한 뒤 오랜 기간 미국에서 활동했고 SK에서는 4년 넘게 김성근 감독을 보좌했다. 이 기간 이만수는 언제나 그늘 속이었다.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최대한 낮췄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는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성실한 자세와 신중한 성품이 아니면 힘든 일이다. 이만수는 야구를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 10년 뒤 최고의 선수가 되자며 스스로와 약속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고 밤 12시에 자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이만수는 대학 때까지 지켰다. 이만수는 은퇴시기를 놓고 구단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 결국 목표로 했던 마흔살까지 유니폼을 입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멤버 가운데 가장 오랜 선수생활이다. 프로라고 하지만 서른 중반이면 완전히 은퇴를 임박한 선수라 평가받는 인식을 바꾸고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제대로 된 은퇴식도 하지 못하고 프로야구를 떠났다. 그러나 이만수는 모든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10여년 만에 국내야구계로 돌아왔다.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된 최고의 순간
이만수는 대구상고 , 한양대 시절에는 우승을 밥 먹듯이 했지만 프로에서는 1985년 통합우승 외에는 우승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그래도 최고의 순간은 있었다. 1983년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나서지 못했지만 이만수는 홈런과 타점 1위에 오르며 시즌 MVP가 되었고 골든 글러브를 처음 받았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골든 글러브는 수비율로 수상자로 선정했다. 골든 글러브가 포지션별 최고 선수에게 주어진 것은 1983년부터다. 이만수는 이해부터 5년 연속 포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1990년대 김동수와 박경완이 등장하면서 이만수는 최고 타이틀을 후배들의 경쟁에 맡긴다. 그러나 1980년대 최고의 포수 스타는 누가 뭐래도 이만수였다. 그리고 독보적이었다. 빙그레 유승안과 해태 장채근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이만수의 위세를 넘을 수는 없었다.
( 프로야구 레전드 에서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