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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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20:07
<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
1980년대 달군 영‧호남의 홈런왕 맞수
라이벌(rival). 사전적 의미는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다.
KBO 초창기에는 이런 라이벌 구도와 스토리가 많았다. 그 중 김봉연과 이만수가 펼친 홈런 경쟁은 가장 흥미로운 라이벌 스토리 중 하나다.
1980년대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이만수와 김봉연의 KBO 최초 100호 홈런 선착 경쟁 속으로 들어가 본다.
‘헐크’ 이만수와 ‘촌놈’ 김봉연의 라이벌 구도
“형님, 삼성만 만나면 왜 그렇게 잘 치십니까. 어디로 뭘 던져야 못 칩니까?”
“만수 너 조용히 안 하냐. 시끄럽다.”
삼성 포수 이만수는 해태 4번타자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서면 쉼 없이 입을 놀렸다. 그럴 때마다 김봉연은 대꾸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가끔씩은 자신도 모르게 반응을 하곤 했다.
“형님, 앞 타석에 못 치셨네요. 죄송했습니다. 이제 좋은 볼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만수의 ‘트래시 토크(상대의 심리를 흔들거나 자극하기 위해 떠드는 말)’는 계속됐다. 급기야 김봉연은 스윙 폼을 가다듬는 척하다 슬그머니 방망이 끝으로 이만수 헬멧을 툭 쳤다.
이만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또 떠들었다.
“형님, 마음 푸세요. 이번엔 그냥 한가운데 하나 드릴게요. 홈런 하나 치시고 시원하게 한잔하러 가셔야죠.”
참다못한 김봉연은 주심에게 하소연을 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됩니다. 이만수 좀 그만 떠들라고 해주세요.”
63홈런 이만수 vs 61홈런 김봉연. 1982년 1984년까지 3년간 둘이 기록한 통산 홈런수였다. 그리고 1985년 4월 22일 이만수가 홈런포를 가동하면서 둘의 홈런수는 65개로 똑같아졌다.
영남 대 호남. 해태 타이거즈 대 삼성 라이온즈. 이만수와 김봉연의 홈런 라이벌 구도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 프로야구 흥행을 이끈 기막힌 소재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당시 두 팀은 전력적으로 최강이었고, 둘은 초창기 최고의 홈런 타자들답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홈런을 때리면서 프로야구 팬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자연스럽게 ‘누가 최고 홈런 타자냐’, ‘누가 먼저 통산 100호 홈런에 도달할까’를 놓고 논쟁과 내기가 끊이지 않았다. 팀의 승패도 승패지만, 그 시절 프로야구는 곳곳에 이런 라이벌 구도와 스토리로 인해 하루하루 야구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원년부터 시작된 김봉연 vs 이만수 홈런 경쟁
1952년생 김봉연, 1958년생 이만수. 나이로는 김봉연이 6살 위다. 김봉연은 연세대 시절까지 검정 고무신에 작업복을 입고 다녀 ‘촌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만수는 괴력의 홈런포를 터뜨리면서 당시 인기리에 방영된 미국 드라마 ‘두 얼굴의 사나이’ 주인공인 ‘헐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촌놈’은 어릴 때 아파서 초등학교를 또래보다 2년 늦게 입학했다. 일찌감치 투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대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우승해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신화를 탄생시켰다.
‘헐크’는 대구중 1학년 때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시절 1년 유급해 또래들보다 1년 늦었다. 타고난 재능보다는 하루 4시간만 잠을 자면서 피나는 훈련 끝에 정상급 타자가 된 노력형. 대구상고 3학년 시절이던 1977년 청룡기 타격왕에 오르며 우승을 이끌었고,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김봉연은 연세대 1학년 시절이던 1973년 투수로서 대학야구 역사상 최초로 노히트노런(춘계연맹전 고려대전)을 기록하고, 타자로서 대학야구 역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추계연맹전 동아대전)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실업팀 한국화장품을 거치며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로 기량이 정점에 오른 상태에서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만수는 한양대를 거치며 공격형 포수로 두각을 드러냈다. 대학 1학년 시절이던 1978년 춘계연맹전 타격상, 타점상, 홈런상을 휩쓰는 등 타격에 관한 한 대학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때마침 대학 졸업하는 해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이만수’ 하면 떠오르는 것이 KBO 역사상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야구장(동대문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고, 원년에 13홈런으로 홈런 부문 4위에 올랐다.
김봉연은 원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주춤했으나 명불허전이었다. 특유의 몰아치기로 22홈런을 기록해 초대 홈런왕에 올랐다. 실업야구 시대와 프로야구 시대를 이어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면서 김봉연은 대한민국 최고 홈런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100홈런 선착 싸움, 초창기 KBO 최고 흥행카드
“대한민국 많은 팬들한테는 어떤 대회보다, 어떤 기록보다 이 100호 홈런이 가장 관심거리였습니다. 1985년까지 제가 100호에서 좀 가깝게 85개로 먼저 앞선 상태였습니다. 김봉연 선배가 좀 몇 개 처진 상태였습니다. 근데 제가 1986년도에 시즌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두 달 정도 출전을 못하게 됐습니다. 그때 김봉연 선배가 85개 타이를 만들고 나서 먼저 앞서고, 제가 두 달 쉬다가 들어와서 또 제가 앞서고….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까 많은 팬들한테, 이게 또 프로야구 흥행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이만수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은 1986년 김봉연과 벌인 100호 홈런 선착 경쟁 상황을 개수와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그 기억이 깊이 각인돼 있는 건 그 시절, 홈런 맞수간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리라.
롯데‧삼성‧태평양 사령탑을 지낸 ‘타격 이론의 대가’ 박영길 전 감독은 “김봉연과 이만수는 색깔도 다소 대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박 감독은 이만수에 대해 “노력형 타자”라고 했다.
“임팩트 순간 힘을 가하는 파괴력에서 최고 수준의 타자였다. 장외 홈런도 많이 쳤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벽 3시, 4시까지 방망이를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훈련벌레였다. 그런 자기관리와 쉼 없는 훈련으로 정교함과 장타력을 동시에 갖춘 최고 타자가 될 수 있었다.”
반면 김봉연에 대해서는 “영리한 타자”라고 했다.
“홈런까지 비거리를 만들어내는 노하우가 있었다. 이만수가 임팩트 순간 누구보다 강한 파워를 생산하는 타자라면, 김봉연은 임팩트 후 팔로스루(follow through)를 길게 쭉 끌고 가면서 홈런 길을 만들어내는 타자였다.”
원년 출발은 김봉연이 좋았다. 1982년 22홈런을 때려 13홈런의 이만수를 9개차로 앞섰다. 그러나 악재가 발생했다. 1983년 전기리그를 마친 뒤 올스타 브레이크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 얼굴을 314바늘이나 꿰맬 정도로 대형 사고였다. 야구선수는커녕 일반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조차 걱정해야할 정도였다.
이만수는 1983년부터 완전히 무르익었다. 27홈런을 때리면서 첫 홈런왕을 차지하며 ‘이만수 시대’가 왔음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김봉연은 병원 침대에서도 방망이를 놓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매진해 40여 일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원년 홈런수와 같은 22개를 맞췄지만 이만수에게 홈런왕을 내주고 2위가 됐다.
프로 2년간 홈런수는 김봉연 44개, 이만수 40개로 4개 차이로 좁혀졌다.
이만수는 1984년 23홈런, 1985년까지 22홈런으로 3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김봉연은 1984년과 1985년 17개씩의 홈런을 보탰다. 그러면서 1985년까지 4년간 이만수는 85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김봉연은 78개를 기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만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갈수록 기량이 무르익어 가는 이만수는 15개만 추가하면 100홈런 고지에 다다를 수 있었고, 노장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홈런수가 줄어들고 있는 김봉연으로선 22개를 쳐내야만 했다.
그런데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1986년 이만수가 극심한 허리 부상으로 장기간 결장을 해야만 했다. 연봉 계약 난항으로 뒤늦게 팀 훈련에 합류한 뒤 무리하게 개인훈련을 하다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 것. 개막을 불과 5일 앞두고 영남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당초 열흘 정도 치료를 받으면 퇴원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한 달 이상 복귀가 늦어졌다. 1986시즌은 3월 29일 개막했는데, 이만수는 5월 6일 시즌 첫 출장을 하게 됐다. 25경기를 허공에 날렸다. 그 사이 김봉연은 홈런 5개를 추가해 통산 홈런수를 83개로 끌어올렸다.
묘하게도 이만수의 시즌 첫 출장은 대구 해태전으로 잡혔다. 해태 선발투수는 선동열. 연장 11회 접전 끝에 해태가 3-2로 승리했고, 선동열은 이날 11회까지 홀로 던지며 6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경기 감각이 없는 데다 당대 최고 투수 선동열까지 만난 이만수는 그날 4타석 중 삼진만 3개를 당한 채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이튿날인 5월 7일. 다시 대구에서 해태-삼성전이 열렸다. 여기서 김봉연은 1회초 1사 만루서 2타점 적시타를 때린 데 이어 2회초 2점홈런을 날리며 시즌 6호이자 통산 84호 홈런을 터뜨렸다. 이만수의 말처럼 김봉연은 유난히 삼성전에 강했다. 김일융의 연승 행진도 16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5월 8일 어버이날. 김봉연은 광주 롯데전에서 또 홈런포를 토해냈다. 이날 삼성 경기는 없어 김봉연과 이만수의 통산 홈런수는 마침내 85개로 같아졌다.
1986시즌 개막할 때만 해도 무려 7개차나 앞서 있던 이만수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봉연 선배가 자신의 눈앞에서 84호 홈런을 때리고, 다음날 광주 롯데전에서 85호로 자신과 타이를 이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청보 핀토스의 허구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난 5월 10일, 잠실구장에서는 삼성 이만수가 MBC전에서 홈런 2방을 몰아쳤다. 시즌 1호와 2호 홈런이 뒤늦게 터졌고, 통산 홈런수도 87개로 다시 앞서나갔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이만수와 김봉연이 모두 홈런을 쏘아 올려 이만수 88개, 김봉연 86개로 2개 차이를 유지했다. 5월 18일 김봉연이 제2 홈구장 전주에서 열린 MBC전에서 87호포를 터뜨리며 1개 차이로 따라붙었다.
5월 21일에는 둘이 동시에 안방에서 홈런포를 가동했다. 김봉연이 전주에서 빙그레를 상대로 4회말 88호 아치를 그리며 마침내 타이를 이뤘다. 그러자 잠시 후 이만수는 6회말 대구에서 89호포를 날리며 1개 차이로 도망갔다.
기어코 타이기록까지 따라붙은 김봉연의 저력에 놀란 것일까. 이만수는 5월 22일과 23일 빙그레전에서 초집중 모드로 연이어 대포를 가동했다. 21일까지 포함하면 3일 연속 홈런포. 이만수는 격차를 3개까지 벌린 뒤에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 5월 29일 인천에서 청보를 상대로 92호를 날렸다. 이로써 이만수는 4개 차이로 앞서나갔다.
김봉연이 5월 31일 열흘 만에 홈런을 터뜨리며 89호를 기록한 뒤 6월 6일 통산 90호 고지를 밟았다. 그러자 일주일간 홈런 생산을 중단했던 이만수도 청보를 안방에 불러들여 93호를 기록하고, 6월 10일 대전에서 빙그레를 상대로 94호포를 가동했다.
김봉연이 6월 13일 청주 빙그레전에서 91호를 기록한 가운데 6월 14일 전기리그가 끝났다. 이때까지 이만수가 94개, 김봉연이 91개로 3개 차이를 유지했다.
이만수는 전기리그에서 뒤늦게 출발했지만 31경기에서 9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통산홈런 1위 자리를 수성했다. 그러나 후기리그 개막 후 6월 26일과 27일 경기에서 뛰었지만 다시 허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8월 2일 복귀전까지 허리 부상으로 다시 한 달 이상 쉰 셈이다.
이때 김봉연은 야금야금 따라붙기 시작했다. 7월 9일 홈구장 광주에서 청보를 상대로 94호포를 터뜨려 이만수와 시즌 들어 4번째 타이를 이뤘다. 그리고는 7월 20일 이만수의 팀 삼성을 광주 안방으로 불러들여 95호포를 날리며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김봉연과 이만수, 손위 동서끼리 친구 ‘기묘한 인연’
병상에서 김봉연이 자신의 홈런수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만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8월 2일 대구구장에서 해태와 격돌하는 스케줄에 맞춰 병원을 박차고 나와 경기에 복귀했다.
경기 전 그라운드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신경전(?)이 시작됐다.
“형님, 제가 없는 동안 홈런 많이 치셨네요. 한여름에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좀 쉬세요.”
“만수야, 허리 아픈 너야말로 좀 더 쉬다 오지 그랬냐? 그나저나 입은 그대로 살아있네.”
“형님, 제가 허리가 아팠지 입이 아픈 건 아니었습니다.”
김봉연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김봉연과 이만수는 홈런의 호적수였지만, 평소엔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김봉연의 손위 동서가 우리나라 최초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 그런데 이만수의 손위 동서와 어릴 때부터 이북에서 친구 사이였다. 둘 다 함경북도 북청 출신으로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피란을 와서 남한에 정착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김봉연과 이만수는 동서를 매개로 가족끼리도 자주 만났다.
“김봉연 선배는 사람이 좋으세요. 근데 김봉연 선배 동서하고 제 동서하고 친구분입니다. 김기수 권투선수하고 우리 큰 동서하고 이북 친구다보니깐, 김봉연 선배하고도 가족끼리 가까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김봉연 선배가 타석에 들어서면 제가 좀 입담이 좀 세 가지고 선배님한테 약을 올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만수는 포수로 앉아 타석에 들어선 김봉연의 신경을 긁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한 사연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입담으로 막 흥분시키게 만들면 못 쳐야 되는데, 선배님은 오히려 홈런을 더 많이 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당황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또 이상하게 제가 광주에 가서 해태 타이거즈하고 경기하면 홈런을 많이 쳤습니다. 반대로 김봉연 선배가 대구 오면 또 이상하게 삼성 라이온즈 팀 상대로 홈런을 많이 치는, 양쪽에 좀 그런 아이러니한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봉연은 고수였다. 이만수의 말처럼, 집요한 입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커녕 홈런을 펑펑 쏘아 올렸다. 특히 유난히 삼성전에 강했다. 반대로 이만수 역시 해태전에 가장 많은 홈런을 터뜨렸다.
그라운드 밖에선 서로 좋은 사이였지만, 그래도 그라운드 안에서는 경쟁 관계. 특히 홈런에 관한 한 자존심이 강한 김봉연과 이만수였기에 KBO 최초 100홈런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날 경기가 시작되고, 김봉연은 이만수의 입을 절로 다물어지게 하는 홈런포를 터뜨렸다. 3-1로 앞선 8회초 승부에 쐐기를 박는 솔로홈런으로 통산 96호를 찍었다. 이만수는 이날 대타로 한 타석에 나섰지만 몸에 맞는 공으로 홈런을 추가하지 못했다.
두 경기에서 대타로만 나서던 이만수는 사흘을 쉰 뒤 8월 7일부터 선발 라인업에 들어갔다. 4타수 2안타로 감을 잡더니 8월 8일 잠실 MBC전에서 통산 95호포를 날렸다. 6월 10일 94호를 기록한 뒤 약 두 달 만에 느낀 손맛이었다. 다시 1개 차이로 추격했다.
김봉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8월 9일 광주 청보전에서 97호를 뽑아내면서 다시 2개 차이로 벌렸다. 고지가 눈앞. 둘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김봉연의 침묵, 이만수의 재역전
당시 100호 홈런 경쟁을 놓고 언론은 홈런이 하나 나올 때마다 대서특필했다. 팬들도 자연스럽게 김봉연과 이만수의 방망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 김봉연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홈런 3개만 추가하면 KBO 최초 100호 홈런에 도달하게 됐다. 주위에서 보기엔 5개를 보태야하는 이만수보다는 한결 부담이 적은 상황이었다.
이만수로선 가장 중요한 해에 허리 부상으로 두 달 이상 결장한 것이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김봉연도 1983년 생사에 기로에 선 교통사고를 당한 바 있다. 부상으로 인한 결장을 놓고 보면 피장파장이었다.
야구에서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둘의 홈런 경쟁도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 김봉연이 갑자기 홈런 생산을 중단할 줄 누가 알았을까. 9월 16일에 뒤늦게 98호와 99호 홈런을 치기까지 거의 40일을 허송세월했다.
슬럼프였을까. 김봉연은 “슬럼프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안타는 계속 잘 쳤고 3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면서 “100호 홈런을 빨리 치고 싶어 욕심을 부렸더니 이상하게 97호 홈런 이후 홈런이 나오지 않았다. 타구가 뜨지 않고 안타만 됐다”고 아쉬웠던 그 시절을 돌아봤다.
그 사이 이만수는 특유의 몰아치기를 시작했다. 8월 19일 96호, 8월 26일 97호가 터져 나왔다. 이만수와 김봉연의 통산 홈런수는 1986년에만 무려 4번째 타이. 원년 초반을 제외하면 통산 9번째 같은 홈런수가 기록된 순간이었다.
이만수는 8월 27일 잠실 MBC전부터 아예 1번타자로 나섰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이만수가 한 타석이라도 더 많이 타석에 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홈런을 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8개 구단 중 가장 발 느린 리드오프였다. 여기서 이만수는 5회말 MBC 두 번째 투수 유종겸을 상대로 98호를 때려냈다.
8월 31일 일요일. 이만수는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청보 핀토스전에서도 1번타자로 등장했다. 1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볼카운트 0B-1S에서 재일교포 잠수함투수 김기태의 2구째 바깥쪽 높은 직구를 잡아당겨 좌중간 장외로 넘어가는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그해 인천구장에서 뽑아낸 첫 홈런. 통산 99호 홈런으로 김봉연을 2개 차이로 앞서나갔다. 이제 100호까지는 1개만 남았다.
대망의 KBO 최초 100호 홈런이 터지던 날
삼성은 9월 시작과 함께 주중 3경기가 예정돼 있지만, 김봉연은 주말까지 해태 경기가 없었다. 이만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김봉연은 한번 홈런을 치면 몰아치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9월 1일이 월요일로 휴식일이라 심신을 추스른 이만수는 2일 안방인 대구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전에 다시 1번타자로 나섰다.
상대 선발투수는 천창호였다. 롯데 자이언츠 원년 멤버로 1986년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하면서 이적한 좌완투수였다.
등번호 22번의 이만수가 1회말 리드오프로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몸 쪽 높은 직구. 먹잇감을 발견한 헐크는 기다리지 않았다. 특유의 공을 쪼갤 듯한 풀스윙으로 통타했다.
누가 봐도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는 초대형 타구.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타구는 높은 발사각으로 대구의 밤하늘에 하얀 무지개를 그리더니 왼쪽 외야 관중석을 지나 장외로 넘어가 버렸다.
2003년 이승엽의 56호 홈런 도전 당시 잠자리채가 유행했지만, 이만수의 100호 홈런을 영상을 보면 그날도 잠자리채를 들고 외야에 들어온 관중이 있었다. 그러나 외야 관중석 끝으로 뛰어올라가 봤지만 홈런 타구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이만수는 특유의 총총 걸음으로 다이아몬드를 달리기 시작했다. 1루에서 손을 내민 정동진 코치와 하이파이를 한 뒤 2루를 돌아 3루 앞에서 갑자기 특유의 ‘껑충 세리머니’를 펼치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3루를 돈 뒤 대구상고 은사이기도 한 정동진 코치와 포옹을 했고, 천진난만한 함박웃음 속에 홈플레이트를 밟으면서 전매특허인 ‘만세 세리머니’를 펼쳤다.
목에 푸른 수건을 걸친 김시진을 비롯해 동료들이 모두 덕아웃 앞으로 마중나와 축하했고, 이만수는 하이파이브를 다 끝낸 뒤 3루 쪽 홈 관중석 앞에서 폴짝폴짝 뛰며 감사 인사를 했다. 팬들도 우레와 같은 박수로 프랜차이즈 스타의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축하했다.
100홈런 기쁨도 잠시…사구 맞고 병원 실려 간 헐크
이슈가 컸던 만큼 선물도 푸짐했다. 대우자동차 르망 위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하면서 금 10냥쭝짜리 골든배트, VTR 등 720만 원 상당의 부상도 받았다. 이만수는 사인볼 100타(1200개)와 전자시계 100개를 대구관중을 위해 내놓았다.
이만수는 100호 홈런의 여세를 몰아 이날 2-0으로 앞선 3회초 두 번째 타석에서도 홈런을 날렸다. 빙그레 바뀐 투수 손문곤을 상대로 좌중간 ‘파랑새존(좌중간과 우중간에 설치된 존으로 타구가 이 존을 맞히거나 넘어가면 특별상금이 주어졌다)’을 넘어가는 홈런포를 가동해 통산 101호를 기록했다.
호사다마일까. 5회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더니 몸을 향해 공이 날아왔다. 홈런 2방을 친 뒤 너무 신나서 과한 세리머니를 하다 보니 상대 팀의 심기를 자극한 것. 이만수는 공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진 뒤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100호는 역사적인 기록이니까 너무 좋아서 다이아몬드를 막 뛰었어요. 그러니깐 상대팀에서 화가 많이 났나 봅니다. 100호 친 거는 좋은데. 너무 액션이 크다 보니까 제가 다음 타석에 딱 들어갔는데 (상대 투수 투구에) 무릎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자리에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근데 100호를 치면 좀 행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행사를 못 했어요. (부상이) 너무 심해 가지고. 그때 그게 좀 아쉬웠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다. 이만수는 기쁨과 아픔이 교차했던 그날, 날짜와 홈런을 친 볼카운트, 타구 궤적까지 기억의 주머니에 정확히 저장해 놓고 있었다.
한편 김봉연은 1986년 99호까지만 뽑아낸 뒤 이듬해인 1987년 4월 9일 광주 MBC전에서 KBO 역대 두 번째 100호 홈런을 기록하게 됐다.
김봉연은 당시를 돌아보며 “이만수는 전성기가 올라오는 시점이었고, 나는 내려가는 추세였다”면서 “다시 한 번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최초 100호 홈런이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으니까 이러다 내가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욕심이 생기면서 오히려 홈런이 안 나오고, 그러다보니 속상하고…. 사실 원년에 홈런왕을 하고 1983년 교통사고를 당했잖아요. 당시 인터뷰에서 ‘내년부터 홈런왕을 가져와 재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1984년, 1985년에 홈런왕은커녕 타율마저 2할4푼대, 2할5푼대에 머물렀어요. 그래서 홈런 욕심을 내려놓고 단타 위주로 치려고 했더니 1986년에 제가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만수와 100호 홈런 경쟁을 할 때 갑자기 의식을 하고 욕심을 내니까 안 되더라고요. 그때 또 깨달았죠. 욕심을 내면 얻을 것도 잃고, 욕심을 비우면 또 채우게 된다는 것을요. 야구나 인생이나 똑 같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이만수가 100호 홈런을 때리고 나니까 홀가분해졌어요. 오히려 그러면서 그 시즌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봉연은 1986년 100호 홈런 선착 경쟁에서 이만수에게 뒤졌지만, 그의 말대로 3할 타율에 홈런왕(21개), 타점왕(67개), 장타율(0.514) 1위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이만수에게 내줬던 홈런왕 타이틀을 4년 만에 가져왔다는 게 큰 위안거리가 됐다.
통산 252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KBO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에 이어 250호 홈런까지 가장 먼저 도달한 뒤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그가 지나간 이후 장종훈이 최초로 300홈런 고지를 밟았고, 이승엽이 최초 400홈런을 돌파했다. 이승엽은 한‧일 통산 626홈런을 기록했지만, KBO리그에서는 467홈런까지 도달했다. 현재로선 최정이 500홈런을 가장 먼저 돌파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의 발자국. 이만수의 KBO 최초 100홈런은 후배들이 자신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하나의 이정표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통산 100홈런이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미 많은 선수들이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수와 김봉연이라는 둘의 라이벌 구도와 치열했던 100호 홈런 선착 경쟁은 우리의 추억 속에 여전히 진한 낭만과 향수로 남아 있다. 그 시절 그게 프로야구를 보는 재미였다.
그 이후 200홈런, 300홈런, 400홈런 선착은 오히려 라이벌과 경쟁자가 없어 싱겁게 끝난 측면도 있다. 현재 KBO에 가장 부족하고 필요한 부분도 이 같은 라이벌 스토리인지 모른다.
이만수와 김봉연. 이들은 우리에게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는 사실과 ‘스포츠는 라이벌 관계로 먹고 산다’라는 진리를 제대로 알려준 히어로들이었다.
글. 이재국 야구전문기자(스포팅제국) | 이미지. KBO, 스포츠서울,스포팅제국,삼성 라이온즈 | 영상. KBO, KBS, 스포팅제국
필자 소개 | 이재국 기자
"야구가 밥 먹여주냐"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야구가 밥 먹여준다"는 걸 증명한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KBO 40주년을 맞아 40가지 전설 속으로 야구여행을 출발한다.
스포팅제국 대표 / 스포티비뉴스 전문위원 / KBS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패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