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삼성이 회사 컴퓨터 화면에 '오타니 쇼헤이' 쓴 이유
입력2023.03.26. 오전 6:01
지난 3월 21일(미국시간) 일본의 우승으로 끝난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오타니의, 오타니에 의한, 오타니를 위한 대회였다.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8·LA에인절스 소속)는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9회초 투수로 등장, 강타자이자 LA에인절스 팀 동료인 마이크 트라웃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며 일본에 우승기를 안겼다. 대회 MVP(최우수선수)가 된 것은 물론이다.
오타니는 일본어로 이도류(二刀流), 영어로 투웨이(Two-Way)라고 표현하는 투타(投打) 겸업의 스타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투수와 타자의 겸업, 오른팔 투구와 왼팔 타격, 실력과 인성의 겸비, 현실 인간과 만화 주인공의 교차, 돈은 벌고 쓰레기는 줍고 등 매체마다 그에 대한 수식어가 차고 넘쳤다. 그는 미소년 같은 얼굴에다, 193㎝의 키와 95㎏의 체중으로 기골이 장대하며, 모범적인 인성과 팬 서비스로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볼보이, 배트보이에 대한 배려
필자는 이번 대회에서 오타니의 매너를 유심히 보았다. 지난 3월 9일 WBC 일본과 중국 경기에 출전한 오타니는 1회말 3번 타자로 나와 볼넷을 얻었다. 다가온 배트보이가 방망이를 집어 들자 오타니는 자신의 장갑과 보호대를 차곡차곡 벗어 건네주며, 미소와 함께 살짝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마워"라고 하는 듯싶었다. 이튿날 한·일전에서도 오타니는 3회말 자동고의 볼넷을 얻었는데, 그때도 배트보이에게 똑같이 대했다.
그런 미담이 처음은 아니다. 2021년 8월 15일 오타니는 시즌 39호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다가 한 사람과 먼저 하이파이브를 했다. 선수나 코칭스태프가 아닌 LA에인절스 볼보이였다. 볼보이와 하이파이브하고 배트보이를 토닥여 주면서, 그는 야구장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온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필자는 50년간 야구경기를 보았지만 그렇게 볼보이나 배트보이를 배려하는 선수는 처음이었다. 국내에서 그나마 근접한 매너를 지닌 선수는 필자의 기억으로 이만수, 이승엽, 이정후, 원태인 정도뿐이다.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오타니는 소문대로 상대가 누구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 그리고 강렬한 승부의식을 지녔으면서도 마음에 여유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오타니는 WBC 기간에도 먼저 인사하고 먼저 웃고 먼저 칭찬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 스타임을 재확인했다.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개막일인 3월 8일 243만명에서 3월 18일에는 368만명을 돌파했다. 결승전 직후에는 425만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인 중에도 "일본이 우승한 것은 싫지만, 오타니가 잘한 것은 좋다" "일본 남자에게 반할 줄이야" "짜증날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라 그저 부럽다" 식의 언급이 많았다. 오타니의 MBTI는 ISFP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오타니는 매너 이전에 선수로서의 기량이 너무 뛰어나다. 8년 전 열린 '2015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두 번의 한·일전에 모두 선발로 나온 오타니의 투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불 같은 강속구로 한국 타자들을 농락했다. 총 13이닝을 던져 안타는 3개만 맞고, 삼진은 21개를 잡고, 무실점을 기록했다. 당시 한국팀 이용규 선수는 "직구가 시속 160㎞로 들어오는데, 내가 말할 레벨이 아닌 최고였다"면서 "큰 폭으로 떨어지는 포크볼이 시속 146㎞로, 한국 투수들 직구보다 더 빨랐으니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2016년 11월 23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소프트뱅크와의 경기에서 니혼햄 소속인 오타니는 시속 165㎞라는 신기록을 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 해설자들은 "넋을 잃겠다. 해설을 못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투수로서 시속 160㎞가 넘는 광속구(光速球)를 수시로 던져대며 지난해 15승9패를 기록했고 방어율은 2.33으로 전체 4위를 기록했다. 엄청난 성적이다. 그런데 타자로서도 0.273의 준수한 타율에다 홈런을 34개나 치면서 4위에 올랐다. 2022년의 기록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15승(투)-30홈런(타)'인 동시에, '규정이닝(투)-규정타석(타) 동시달성' 기록이었다. 오타니는 메이저리그에 처음 진출한 2018년 신인왕을 받았고, 2021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만장일치 아메리칸리그 MVP(최우수선수)가 되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다.
'좋은 생각에 좋은 선수'
오타니를 지켜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제조업이 떠올랐다. 예전 도요타자동차의 다카오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공장 내부에 크게 걸린 'よい品 よい考 (좋은 제품 좋은 생각)'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제품은 완벽한 품질로 유명했으니까. 1994년생인 오타니는 자기가 태어나기 직전 일본 제조업의 혼(魂)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좋은 생각에 좋은 선수' 말이다.
우리는 야구를 왜 좋아하는가. 야구는 제조업인가, 물류업인가, 서비스업인가. 선수 입장에서는 최선의 기량을 선보임으로써 관중이나 팬에게 최대의 만족을 주는 게 본질이 아닐까. 특히 국가대항전이라면 몸으로 무엇을 보여주기 전에 '좋은 생각'부터 준비해야 한다.
WBC에서 참사를 당한 한국팀의 어느 선수는 인터뷰에서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계속 말했다. TPO(시간·장소·경우)에 대한 개념이 모자란다. 국내 경기에서야 '팬'이지만, WBC는 국가대항전이라 당연히 '국민'이다. 야구를 모르는 할머니도, 주부도 국가대항전이기에 본다. 2루 베이스에서 세리머니를 한다고 발을 떼었다가 죽는 희대의 웃픈(웃기지만 슬픈) 참사가 빚어진 것이나, 올림픽 경기에 벤치에서 질겅질겅 껌을 는 모습을 노출한 것은 조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오타니는 WBC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하면서 역시 남달랐다. 그는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서 3회 기습 번트를 대 안타를 만들었다. 슬러거(Slugger)로서는 뜻밖의 행동이었다.
오타니는 "기습번트에 자존심? 난 자존심 같은 것 없다. 특히 일본팀의 승리보다 앞서는 자존심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잘라 말했다.
한국인들은 17년 전 일본의 천재타자 스즈키 이치로(49)가 했던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이 일본을 이길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도발적인 발언을 기억한다. 이치로는 그 말 한마디로 상당수 한국인 팬들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런다고 일본의 위상이 더 올라가는가. 그와 비교하면 오타니는 이번 WBC에서 사뭇 다르게 말했다.
오타니는 지난 2월 17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전에도 훌륭한 팀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선수들을 정말 좋아한다. 메이저리그에도 한국선수들이 있는데 다들 좋은 선수들뿐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경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도 "일본도 우승했는데, 아쉽게 탈락한 한국과 대만도 '다음 기회에는 우리도'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말이다. 그에 비해 "이번 대회에서 오타니에게 던질 곳이 없다면 아프지 않을 곳을 맞히겠다"는 어느 한국팀 투수의 발언은 경기장 밖에서까지 완패하는 초라함이 되고 말했다.
전기기사인 체코 투수에 대한 존경
일본 대표팀은 지난 3월 17일 4강전이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에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나오는 오타니의 모자에 일본이 아닌 체코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일본은 3월 11일 체코전에서 10 대 2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타니는 본업이 '전기기사'인 체코 투수 온드리제 사토리아에게 3구 삼진을 당했다. 오타니는 소셜미디어(SNS)에 체코팀 사진과 함께 'Respect(존중)'라는 단어를 남겼다. 사토리아와는 경기를 마친 뒤 따로 만나 사인공과 배트를 선물했다.
오타니는 "실력과 관계없이 체코 선수들이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점에서 존경심을 느꼈다"고 밝혔다. 체코는 나라 전체가 감격하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탈리아를 상대한 뒤에도 "(LA에인절스 동료인) 플레처에 한정하지 않아도 좋은 타자들이 많았다고 생각했다"고 경의를 표했다. 오타니는 경기장 안팎에서 자신의 말로 전 세계 사람을 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 프로야구도 잠시 경험했던 김태균 야구해설위원은 "오타니는 슈퍼스타가 아니라 우주스타 대접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타니는 3월 20일 멕시코와 준결승전에서 4 대 5로 뒤지고 있던 9회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선두타자로 나와 번개 같은 스윙으로 우중간 2루타를 날려 6 대 5 역전승의 기틀을 만들었다. 1루를 밟기 전에 헬멧을 벗어던지고 2루 베이스에서 포효하면서 동료들을 향해 반드시 이기자는 독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과의 결승전을 앞두고도 "우선은 즐기는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이긴다는 마음을 가지고 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야구선수들에게 "기량 측면에서 오타니를 벤치마킹하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타니는 어릴 때부터 싹이 달랐다. 스포츠맨 경력이 있는 부모·형·누나의 유전자를 따라서인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속 110㎞의 초(超)초등학교급 강속구를 던졌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처음으로 장외홈런을 때렸다. 체력과 훈련방법이 어릴 때부터 남달랐는데, 괜히 그대로 따라 하다가 자기 스타일만 망친다.
물론 이런 점은 있다. 가령 오타니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처음에는 오른 다리를 들고 치는 레그킥 타법을 고집했다. 하지만 비디오를 분석해 보니 빠른 공에 신속하게 대처하려면 레그킥 타법을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타격 폼을 수정했다.
일부 한국 타자들은 투수들의 공이 느린 국내 리그에 적응되어서인지, 국제 경기에 나가서도 레그킥을 고집한다. 답답해 보인다. 그런 점은 오타니를 따라 해도 좋을 듯싶다. 또 오타니는 고교 시절 마운드에서 와인드업을 했으나, 니혼햄부터는 세트포지션에서 공을 던졌다. 제구가 흔들리고 공 스피드가 줄어들 법한데, 나름의 방법으로 잘 이기는 듯했다. 연구해볼 만하다.
인간성 좋은 사람이 운도 좋다는 생각
그보다도 한국 선수들이 배워야 할 대목은 바로 경기장 안팎에서 오타니의 '생각', 즉 야구를 대하는 태도와 매너라고 할 수 있다. 고교 시절 스승인 사사키 히로시 감독은 "오타니가 고교 시절 전체 교과목 평균이 85점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면서 "기숙사 청소도, 글짓기도, 제출물도 제대로 다 하는 등 인성이 훌륭했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그랬을까. 오타니는 하나마키히가시(花卷東)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다라트(Mandalart·연꽃 기법) 계획표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실천하고 있다. 만다라트는 일본 마쓰무라 아스오가 개발한 사고 기법인데, 활짝 핀 연꽃 모양으로 아이디어를 확산해 나간다. 큰 정사각형 한가운데 핵심목표를 적고, 8개의 세부목표를 빙 둘러 가며 적는다. 다시 퍼져 나간 각각의 정사각형 안에는 8개씩의 실행계획을 적는다.
고1 때 오타니의 최고 목표는 일본 프로야구 8구단에서 드래프트 1순위가 되는 것이었다. 야구 기량에 대해 세밀하게 적은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드래프트 1순위가 되려면 운(運)이 필요하고 그 운은 인간성 좋은 사람이 되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놀랍다. 이를 위해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고, 예의와 배려와 감사가 몸에 배어야 한다는 다짐도 했다.
눈에 띄는 것은 쓰레기 줍기다. 요즘도 오타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쓰레기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그는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운을 줍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면 "나는 운이 없어서"라고 치부한다. 오타니라면 아마 "길에 있는 쓰레기부터 먼저 주워 보세요"라고 충고할 것이다.
그라운드 매너도 미국 선수들을 놀라게 한다. 타석에서 바닥에 떨어진 상대방 포수 마스크를 집어든 뒤 흙을 털어서 건네준다. 스프링캠프에서 타격 연습을 마치면 직접 공을 주워 바구니에 담는 등 뒷정리를 깔끔하게 한다. 투수로서 주자를 태그아웃시키면 손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마운드에서 상대 선수의 부러진 배트를 직접 주워서 배트보이에게 건네준다. 물론 이때 공을 던지는 오른팔 보호를 위해 반드시 글러브를 벗어 왼손으로 줍는다. 심판의 명백한 오심(誤審)이나 다소 불쾌할 수 있는 부정투구 검사에도 담담하게 웃기만 한다. 자기가 친 파울볼이 더그아웃이나 관중석으로 빠르게 날아가면 소리를 질러 조심하라고 한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동료들이 음담패설 할 때면 슬며시 빠져나간다고 한다.
주역(周易)에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란 말이 나온다.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넉넉한 경사가 있다는 뜻이다. 성경도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좋아하던 계란도 식단서 제외
자기 관리도 철저하다. 오타니는 유년시절부터 계란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2020년 11월 신체검사를 통해 계란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식단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스쿼트, 바벨 런지, 힙스러스트,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플라이오메트릭 등을 이용한 훈련도 다른 선수보다 성실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WBC에서 한국팀의 참사 요인에 대해 여러 언급이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생각'이 아쉬웠다. SBS 이순철 해설위원은 "요즘 국내 프로야구 시범경기를 보면 WBC 참사에서 교훈을 얻겠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스포츠서울 장강훈 기자는 "야구인 스스로 '존경받을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지가 처참한 성적보다 먼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존경하는 사람이 실패하면, 비난보다 격려의 목소리가 크다. 세계 야구의 흐름은 우월한 기술이 아닌 대중과 공감이다"라고 지적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와 SK 감독을 지낸 이만수 홈런왕도 "어린 선수들에게 몸으로 아무 생각 없이 100번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자기 약점을 정확히 이해하라고 한다"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즐거움을 느낄 때 선수들 기량은 훨씬 발전한다"고 말했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오타니의 '좋은 생각'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궁금하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오타니도 은퇴한다. 세계 야구사에서 100년이 아니라 1000년 만에 등장한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최홍섭 칼럼니스트
idf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