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 야구, 청룡기 열정에서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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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 야구, 청룡기 열정에서 배워라

최고관리자 0 1,397 2023.07.03 04:16
위기의 한국 야구, 청룡기 열정에서 배워라

입력2023.07.02. 오전 10:44

청룡기를 빛낸 스타 투수들. 1976년 청룡기 우승의 주역인 고 최동원 경남고 투수, 1981년 우수투수상을 받은 경북고 성준 투수, 1993년 청룡기에서 배재고를 상대로 역투하고 있는 경북고 2학년 이승엽 투수


한국 야구는 2020도쿄올림픽과 WBC를 통해 국민을 크게 실망시켰다. 게다가 국가대표로 외국에 나가 술집을 방문한 사례가 뒤늦게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다 프로야구 최고 명문 구단인 삼성라이온즈가 지난 6월 22일 최하위인 10위로 떨어졌다. 물론 누구나 꼴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삼성라이온즈의 추락은 삼성그룹이 스포츠단을 사실상 방치하면서 나온 결과라는 우려가 많다. 물론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과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프로야구단이 10개나 되면 질적인 저하가 벌어진다"면서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고 더 이상 프로야구단 신설을 하지 말자고 했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또 삼성이 우승을 하면 "돈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더니 스포츠까지 장악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글로벌 기업 중에 이렇게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곳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회의도 들었다.

그래서 삼성은 스포츠단을 제일기획 소속으로 옮긴 뒤, 제일기획 자체를 매각하는 수순을 통해 스포츠단을 정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제일기획 매각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삼성 스포츠단은 좋게 말해 자력갱생(自力更生)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 수준에 이르렀다. 6월 말 현재 삼성의 야구·축구·남자농구·남자배구가 모두 꼴찌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건희 회장이나 전략기획실에서 "그룹 이미지를 추락시켰다"면서 철저한 진단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대안은 두 가지다. 이재용 회장이 경영을 살리려 애쓰듯 삼성라이온즈를 전면 혁신하든지, 아니면 신속하게 매각하는 것이다. 지금 상태로 놔두는 일은 주요 고객이기도 한 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보다 치명적인 잘못은, 삼성그룹 역사에서 이렇게 무성의하고 무책임하게 사안을 처리하는 선례를 남긴다는 점이다.

야구는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박수를 받는다. 지금 한국 야구가 외면당하는 것은 열정과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지를 갖고 최선을 다하던 과거 고교야구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의 무대

국내 고교야구는 시기별로 구분이 된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81년까지는 애향심과 애교심을 바탕으로 요즘 한국시리즈와 비슷한 인기가 있었다. 기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몸을 사리지 않고 던지고 치고 달리는 열정에 모두 감동했다. 단판 승부인 토너먼트인 탓도 있지만, 경기마다 투혼이 대단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으로 고교야구 인기는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 2007년까지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가 열렸다. 2011년부터 주말리그 형태와 결합하고 투구제한 규정 등이 강화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60구 이상을 던진 투수는 2일간 의무 휴식을 가져야 한다는 식이다. 긍정적 효과가 많지만, 선수들 기량은 늘지 않고 관중석은 비어 있다. 여전히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고시엔(甲子園) 고교야구 대회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때마침 7월 8일부터 조선일보 주최로 제78회 청룡기 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국내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청룡기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시작됐다. 선수권(選手權), 즉 챔피언십(championship) 대회라는 점에서 남다른 품격을 지니고 있다.

1988년 7월 3일 제43회 청룡기 결승전. '바람의 손자' 이정후(키움)의 아버지인 '바람의 아들' 이종범(LG트윈스 코치)이 전국구 스타로 등극한 날이다. 사실 그해 먼저 열린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향 광주상고가 우승을 하자, 광주일고 야구부는 유탄을 맞았다. 유창원 광주일고 코치는 "광주상고는 대통령배 우승했는데, 너희들이 청룡기 우승 못 하면 인간도 아니다"라며 유격 수준의 고강도 훈련을 시켰다. 재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팬티 바람으로 4시간 동안 운동장을 구르는 기합도 받았다. 덕분에 청룡기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예선전에서 경남고에 7 대 6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이 한 가지 사례다.

전국구 스타로 등극한 '바람의 아들'

결승전에서는 군산상고와 만났다. 군산상고가 먼저 2점을 내자 광주일고가 솔로홈런 등을 묶어 3 대 2로 뒤집었다. 하지만 8회에 다시 홈런을 맞아 3 대 3이 되었다. 연장 11회 초 군산상고가 광주일고 우익수의 에러로 1점을 얻자, 이종범은 "청룡기와는 인연이 없는 줄 알았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11회 말 연속 안타로 원아웃 1·3루의 찬스가 왔다. 그러나 9번 타자의 총알 같은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1번 이종범의 차례가 되었다. "원스트라이크 스리볼이었는데 바깥쪽으로 약간 흐르는 슬라이더를 그대로 끌어당겼죠." 좌익선상을 흐르는 안타였고, 주자 둘이 모두 홈에 들어와 3시간45분에 걸친 혈투는 5 대 4로 끝났다.

이종범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광주일고는 김양중(당시 광주서중)이 던지던 1949년 대회 이후 39년 만에 청룡기를 안았다. 물론 최우수선수상은 이종범에게 돌아갔고, 그때부터 '야구천재 이종범 전성시대'가 열렸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와 SK 감독을 역임한 뒤 라오스·베트남에 대한 야구 선교에 주력하고 있는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그는 지난 6월 12일 '제1회 이만수배 발달장애인 티볼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자신의 야구 재능을 열정적으로 사회에 기부하고 있다. 청룡기와의 만남은 이만수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대구상고 1학년이던 1975년 청룡기 대회에서 1호 홈런을 쳤다.(그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에서도 1호 홈런을 쳤다.) 투수가 던진 공이 달 덩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경기 전날 밤 설레는 마음으로 야구장을 돌아보며 간절히 열망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만수 납치극'의 반전

고3 때인 1977년에는 대회를 앞두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 번은 친구와 놀다가 숙소에 밤늦게 복귀했는데 정동진 감독이 "이만수가 납치됐을지 모른다"면서 경찰에 신고했다. 나중에 정 감독은 "주장인 네가 시간을 이렇게 안 지키는데 어떻게 팀이 우승하겠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고, 그 일을 계기로 모두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연습했다. 4강전에서 아쉽게도 동산고에 1 대 2로 석패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이를 악물고 최종결승전까지 올라갔다. 기세등등한 동산고를 상대로 1차전은 3 대 1로 이기고, 여세를 몰아 마지막 경기인 2차전은 7 대 2로 대파했다. 당시 이만수는 주장으로서 박영진·오대석·홍승규 등의 동료들을 독려했고, 결국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타격상·최다안타상·타점상 등 4관왕에 올랐다. 이만수는 지금도 "네버 에버 기브 업(Never ever give up)"을 외친다. 즉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말을 위기의 한국 야구계에 던지고 있다.

KIA 타이거즈 단장을 역임한 조계현 KBO 전력강화위원장. 군산상고 시절 팔이 약간 내려온 스리쿼터형으로 '싸움닭'이란 별명처럼 공격적인 강속구와 변화구를 뿌려 댔다. 그는 2학년 때인 1982년 청룡기 우승을 위해 독하게 훈련했다. 오전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습하는 것도 모자라, 밤에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난로에 나무로 불을 때 가며 훈련했다. 강속구의 안성수(작고) 투수가 버티고 있던 천안북일고와 결승전은 연장 12회까지 피를 말렸지만 1 대 1이 되어 다음 날 재경기를 벌였다.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조계현은 이를 악물고 던졌고 결국 9 대 5로 이겼다. 그는 "당시 두 경기가 너무나 치열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끔 그때 영상을 본다"고 말했다.

'싸움닭' 조계현의 사투

1985년 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서울고 김동수 포수. 서울고는 1984년에 대통령배와 봉황대기를 가져갔고, 1985년에도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우승했다. 강속구 우완 이용호, 기교파 좌완 박형렬 등 멤버가 출중했다. 하지만 광속구(光速球)를 던지는 부산고 박동희와 동산고 정민태 등이 있어 쉽지 않았다. 김동수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전관왕(全冠王) 한번 해보자"면서 하루 1000개씩의 배팅 연습을 했다. 동산고와 8강전에서는 3 대 3 동점이던 8회에 2루타로 나간 뒤, 임형석의 안타 때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어 결승점을 올렸다. 김동수는 부산고와 결승전에서 박형렬 투수가 제구력을 잃지 않도록 차분하게 리드하면서 3 대 2로 승리했다. 당시 서울고가 막강해진 것은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서울 예선전에서 보성고에 콜드게임 패를 당한 적이 있어서다. 그때 김동수를 중심으로 "우리가 교만했다. 자만심을 버리고 매 경기 최선을 다하자"고 결의했던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대문야구장 시절에는 투수가 일단 마운드에 오르면 보통 완투를 했고, "내가 다 책임진다"는 자세로 던졌다. 1967년 최우수선수상과 1968년 우수투수상을 받은 경북고 임신근(작고), 1971년 우수투수상을 받은 '한국 고교야구의 넘버원 전설'인 경북고 남우식, 1978년에 우수투수상을 받은 부산고 양상문이 그런 경우다. 1971년 전국 6개 대회를 싹쓸이 우승시켰던 경북고 남우식은 청룡기에서도 다섯 게임을 완투했다. 1점 이상 허용하는 법이 없었고 최종결승전에서는 경남고를 1 대 0으로 완봉했다. 부산고 양상문은 자로 잰 듯 묵직하고 날카로운 강속구를 찔러 넣는 초고교급 투수였다. 1978년 대회에서 41이닝을 던져 2점만 허용, 방어율 0.44의 괴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어깨를 혹사한 탓에 정작 대학·실업·프로야구에서는 고교 때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누구보다 총력을 다했던 고교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6년 대회에서는 경남고 최동원이 괴력을 발휘했다. 최동원은 승자결승전에서 군산상고 타선을 상대로 삼진 20개를 잡아내며 9 대 1로 완파했다. 경남고는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군산상고와 최종결승전을 벌였는데, 이번에도 최동원은 탈삼진 12개를 기록하며 군산상고를 5 대 0으로 완봉하고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당시 군산상고 최관수 감독은 최동원의 빠른 공을 치기 위해, 한양대 야구장을 빌려 피칭머신의 속도를 150㎞/h로 맞추어 놓고 밤늦게까지 연습했다. 덕분에 최동원에게 당한 삼진을 20개에서 12개로 줄였다는 '웃픈(웃기지만 슬픈)' 스토리가 나왔다. 군산상고 2학년 김성한은 "어찌된 게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최동원의 공이 더 빨라졌다"고 회고했다.

훗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은 모두 청룡기를 묵직하고 의미있게 거쳐 갔다. 보스턴 레드삭스 등에서 뛰었던 김선우 휘문고 투수는 1994년 대회 1회전에서 광주일고와 맞붙었다. 9이닝 동안 5실점하며 완투승을 거두었는데, 7회에는 직접 역전 2루타를 때려 냈다. 김선우는 결승전도 완투하면서 승부를 결정짓는 2점 홈런까지 쏘아 올렸다. 최우수선수상은 당연한 몫이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소속으로 한국인 최초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낀 김병현은 광주일고 2학년이던 1995년 대회에서 43개의 탈삼진과 함께 23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 평균자책점 0.31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당시 광주일고 멤버 중 우수투수상을 받은 3학년 서재응은 뉴욕 메츠, 대형 4번 타자인 1학년 최희섭은 시카고 컵스에서 활약했다.

그런가 하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뛰었던 봉중근은 1997년 신일고 2학년 때 청룡기에서 원맨쇼를 펼쳤다. 배명고와 결승전에선 좌완투수로 맹활약했고, 공격에서는 4타수4안타를 기록했다. 대회 전체를 통틀어 보면 만루홈런 1개를 포함, 16타수11안타(0.688)와 9타점으로 최우수선수상·타격상·타점왕을 휩쓸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류현진은 2005년 대회에서 평균자책점 1.64로 인천 동산고의 우승에 기여하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류현진은 대구고와 결승전에서 4타수3안타를 치는 등 좋은 타율도 기록했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심심찮게 안타를 치는 것도 사실 동산고 시절에 길렀던 타격 실력 덕분이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서 활약했던 스타도 청룡기 우승 경험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1987년 대회에서 대전고는 좌완 구대성의 역투로 경남고를 6 대 5로 누르고 우승했다. 구대성은 이후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4년간 뛰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메츠에서도 1년을 활약했다. 상대 타자에게 등은 보이고 공은 숨긴 채로 와인드업하는 특이한 폼으로 인해 타자들은 그를 무척 어려워했다.

경북고의 '기본기'에 무너진 선린상고

삼성라이온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이승엽 두산 베어스 감독은 고교시절엔 촉망받는 좌완투수였다. 경북고 2학년이던 1993년 대회 때 군산상고와의 결승전에서 시속 145㎞의 강속구를 던지며 8이닝을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이승엽은 대회 통산 20이닝을 던져 1.74의 빼어난 방어율로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당시에도 홈런왕의 가능성을 보였다. 결승전 때 3 대 3 동점에서 4회 말 등장한 5번 이승엽은 결승 홈런을 쏘아 올렸다.

야구는 스타도 필요하지만, 기본기가 최고임을 보여준 것은 1981년 결승전이었다. 당시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던 박노준·김건우의 선린상고 우승은 당연지사였다. 이들은 1학년 때 팀을 준우승에 올렸고, 2학년 때는 마산상고를 5 대 0으로 꺾고 우승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북고는 기본기로 움직이는 팀이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는 실책을 연발했고, 결국 연장 11회 박노준은 경북고 3번 홍순호에게 결승타를 맞고 만다. 비가 내리는 속에 3루주자 김윤영이 발랄하게 홈인하는 모습은 선린상고에 비탄의 장면이 되었다. 선린상고는 경북고 좌완 에이스 성준의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고 결국 승부는 6 대 5로 끝이 났다. 조선일보 1981년 6월 23일 자 기사는 "청룡기대회 평균 게임당 에러가 3.3개였으나 경북고는 4경기 동안 총 3개만을 기록했고 그나마 결승전에서는 에러가 없었다. 호화멤버의 선린상고는 에러로 자멸했다"고 보도했다. 지금 국내 프로야구 10개 팀 중에 1981년의 경북고보다 수비를 안정적으로 잘하는 팀이 과연 있을까 싶다.

올해 제78회 청룡기 대회(겸 주말리그 왕중왕전)는 7월 8일부터 24일까지 서울 목동야구장과 신월야구공원야구장에서 열린다. 지난해 우승팀 유신고를 비롯, 모두 53개팀이 자웅을 겨룬다. 특히 올 9월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고교생으로는 드물게 국가대표에 선발된 장현석 마산용마고 투수가 시속 157㎞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를 보여 줄 전망이다.

한국의 프로야구 선수들은 일부 용병을 제외하곤 대부분 청룡기에 출전해 본 경험이 있다. 스스로 돌아볼 때, 고교 시절보다 기량은 조금 늘어난 것 같지만 열정과 진정성은 위축되지 않았는지 점검하면 좋겠다.

최홍섭 칼럼니스트 idfch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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