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행복한 스포츠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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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행복한 스포츠 선교사 >

최고관리자 0 1,724 2023.09.10 06:03
< 나는 행복한 스포츠 선교사 >

역대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서 가장 파이팅 넘치는 선수이자 홈런왕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은 이만수 전 삼성 라이온즈 포수다. 그는 1983~85년 3년 연속 홈런왕이었고 동시에 타점왕이었다. 최고 기록은 1984년이었다.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홈런 1위, 타점 1위, 타율1위)이라는 대기록을 최초로 달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선수는 이만수, 이대호 두 명뿐이다. 국민 타자라 불리는 이승엽 선수도 없는 대기록이다.

그는 평생을 야구인으로 살아오면서 팬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는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로 활약하는 등 개척 정신과 불굴의 투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야구로 복음을 전하는 스포츠 선교사로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현재 그는 SK 와이번스 감독직을 내려놓은 뒤 사비를 털어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건너가 야구를 전파하고, 베트남에 이어 인도차이나반도의 국가들에 프로야구의 씨앗을 심고 선교하는 비전을 실천 중이다. 또한 재능기부로 전국을 다니며 어린이와 청소년, 발달장애 아동들을 만나, 평생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고 생생한 삶의 간증을 전하고 있다.

이만수 선수는 한양대학교 선수 시절, 친구 김시진(프로야구 최초 통산 100승 투수)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알게 된 1학년 동년배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바로 지금의 아내인 이신화 권사다. 첫사랑에 빠져 열심히 구애한 끝에 3년을 데이트했다.

같이 교회에 가자는 아내의 권유가 종종 있었지만, "하루 네 시간만 자고 새벽부터 연습하는 내가 무슨 교회냐. 교회 갈 시간 없다”고 응수하며 회피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다 3학년 어느 날 결별 통보를 받았다. 아내는 3년 동안 전도했지만, 반응이 없자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심장이 쿵 떨어진 이만수는 절박한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계속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아내는 주일에 같이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내의 전도로 처음 간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그는 처음에 수많은 성도가 큰 예배당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 낯설고 어지러웠다고 한다.

40대였던 조용기 목사님의 청중을 압도하는 설교를 들으며 인생 처음 주일예배를 경험했다. 경상도 억양이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설교가 끝나고 목사님의 콜링 시간이 있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처음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일어나세요."

그는 창피해서 그냥앉아 있었는데, 옆에서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일어나라고 독촉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 첫예배였다.

그때부터 아내를 따라 예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새 생명 이만수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아프면 기도했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온전히 맡기는 기도로 시작했다.

아내 이신화 권사의 믿음과 내조

이만수 장로(1958년생, 인천은혜의교회)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가 연고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이사하면서 대구제일교회와 아멘교회에 출석했다. 5년 만에 결혼한 아내 이신화 권사는 평생 그의 신앙생활 안내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내 덕분에 무교였던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게 됐고, 야구 선수로 감독으로 항상 바쁘게 살아서 잘 챙겨주지 못한 두 아들(하종 언종)도 믿음 안에서 잘 키울 수 있었다. 운동선수는 잘 먹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데, 아내의 음식 솜씨 또한 일품이어서 이런 배우자의 내조를 받게 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린다.

이만수 장로가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아내의 기도와 사랑이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선수가 되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 밑바닥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을 때,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악평에 시달릴 때 이신화 권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현숙한 여인답게 남편에게 힘을 더해 주었다.

이만수 장로는 평생 잘한 일이자 가장 감사한 일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하나님을 믿은 일,
둘째, 아내를 만난 일,
셋째, 야구 선수를 한 일입니다."

프로야구 원년 스타, 레전드 중 레전드로 사랑받는 이만수 장로는 인생의 감사한 우선순위 첫째와 둘째가 하나님과 아내다.

스포츠 선교사로 인생 2막을 사는 이만수 장로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 원정경기 중에도 이만수 선수는 주일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어느 지역이나 선수단 숙소 부근에는 교회가 있기에 지역의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불교세가 상당히 강한 삼성 라이온즈였지만, 양준혁, 이승엽, 성준, 이중화 등 후배들은 이만수라는 선배 덕에 함께 예배했다.

독실한 불자이며 고교야구 시절부터 무서운 선배였던 장효조에게 용감하게 전도했다가 따귀를 두 대나 맞기도 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10년 만에 장효조 선배를 만났는데 빰을 심하게 때리며 화를 내던 선배가 '만수야, 나 교회 다녀' 하는 거예요. 저는 장효조 선배는 하나님도 전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내 아들이 목사다' 하는 겁니다."

선수 시절에도 전도에 힘썼던 이만수 장로는 SK 와이번스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는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힘을 쏟으며,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로 건너가 야구로 복음을 전했다. 언론과 야구팬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스포츠 선교사로 인생의 후반전을 뛰는 남편을 전폭적으로 응원했다.

라오스와 베트남 야구 보급에 나서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을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돼서 한번은 아내에게 “우리 이제 뭐 먹고 살아?” 라고 물었다.

아내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왔다.
“당신이 50년 넘게 야구하면서 주위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커요. 숟가락 못들 정도 되면 애기할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편히 좋아하는 야구로 기쁘게 복음을 전하세요."

스포츠 선교사로서 인생 2막을 사는 그의 곁에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일에 순종하도록 권면하며, 언제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아내의 기도가 있다.

한국의 베이브 루스, 그의 시련과 영광

이만수 감독은 별명이 여러 개다. 아마추어 시절 누구보다도 독하게 연습한다고 독종으로 불렸고, 프로선수 시절 홈런을 칠 때마다 두 팔을 들고 환호하며 뛰는 퍼포먼스로 헐크라는 별명이 자주 언급됐다. 미국에서 감독수업을 받을 때는 영어가 익숙지 않아 늘 크게 웃으며 알아든는 척했더니 빅스마일로 불렸다.

이감독을 소개하는 미국 기사에는 한국의 베이브 루스(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통하기도 했다. 팬들에게 가장 크게 알려진 별명은 헐크다. 이 감독도 이 별명에 애착이 있어 자신이 운영하는 야구 재능기부 재단의 이름을 '헐크파운데이션'이라고 지었다.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는 스타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요즘 같지 않았다. 이 감독도 특별한 배려 없이 갑자기 현역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됐을 때 몹시 고통스러웠다. 에이전시의 소개를 받아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A팀에서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미국 생활은 생각보다 휠씬 더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이름난 야구 선수라 어디를 가도 알아봐 주었지만, 미국에서는 무명의 동양인으로 인종차별 대상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언어, 음식, 문화의 장벽에 부딪히며 거구의 어린선수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몇 번을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홍해와 바로 왕 사이에서 두려워 떨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주시며 이 감독을 인내하게 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장 13절)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국의 홈런왕임을 믿을 수 없다며. 공 열 개를 던져줄 테니, 홈런 한 개만 쳐보라고 그들이 테스트를 해왔다. 이 감독은 몸시 당황했다. 타격 훈련을 쉰 지 6개월이 넘었고, 체중이 불어 몸이 둔해졌기 때문에 홈런을 친다는게 볼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감독은 "제가 홈런을 못 치면 계속 조롱을 당할 겁니다. 제게 힘을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한 개도 치기 어려운 홈런을 여섯 개나 치게 하는 힘을 주셨다. 이 정도면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 나가도 우승할만한 기록이었다.

이 감독은 하나님의 은혜로 처음 목표한 것보다 빠른 3년 만에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코치가 됐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코치라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2005년 화이트삭스는 8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내에 100만 명의 인파가 모여 카퍼레이드를 맞이했고, 시야를 가릴 만큼 많은 색종이가 시카고 거리를 수놓았다. 시카고 교민들은 카퍼레이드 선두에 있는 고국의 슈퍼스타 이만수를 보면서 행복해했다.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미국인 투수를 전도한 이야기

“제가 코치할 때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마크 벌리라는 신인 투수가 있었어요. 제게는 아들 뻘이었지만 친구로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 선수가 미네소타 돔구장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임시로 마운드에 올라가게 됐는데, 그때 저에게 와서 '만수야. 너무 긴장된다. 어떡하면 좋냐?'며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어, 그래. 포수가 사인하면 한가운데로만  던져라. 잘 해낼거야'라고 격려해 주었더니 그날 아주 잘 던졌습니다.

마크 벌리는 그날 이후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메이저리그 투수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완봉승을 해내는 최고 선수로 성장했죠. 당시 제가 그에게 어설픈 영어로 계속 전도했어요. 처음엔 그저 알았다고만 하며 반응이 없다가 후에는 1승을 하면 교회에 다니겠다고 하터군요.”

그러나 마크는 1승을 한 뒤에도 10승을 하면 교회에 가겠다며 번복했다. 메이저리그에서 10승 투수는 흔치 않다. 그런데 다음 해 마크는 10승을 해냈다. 그래서 결국은 이 감독의 전도로 교회에 가게 됐다.

“마크는 저와의 약속을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교회에 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얼마 후 백인 노부부가 찾아왔어요. '만수 리? 우리는 마크 벌리의 부모야 우리 집은 신실한 가족인데 마크가 야구하면서 교회를 안 다녔어. 그런데 너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됐으니 감사해서 찾아왔어. 땡큐!"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시다. 이 감독의 서툰 영어를 통해서도 전도가 이뤄지게 하셨다.

야구로 선교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이만수 감독은 53년 야구 인생에서 SK 와이번스 감독 하차 후 지난 10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프로구단 감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 같다.

"프로구단 감독은 화려해 보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지만, 감독이라는 이름 외에는 행복이 없어요. 그런 생활을 해온 제게 하나님은 인도차이나반도를 보여주셨어요. 야구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셨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지도자로서 역량을 인정받던 이 감독은 야구계의 여러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좁은 길을 택했다. 은퇴하고 재능기부로 봉사하면서 거의 전 재산을 라오스에 야구의 씨앗을 심기 위해 투입한 것이다. 많은 이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명예, 인기, 경제적 안정은 없어도 그에게 참 기쁨은 야구를 통해 전하는 복음에 있었다. 모든 열정을 쏟았고, 많은 자원봉사자를 만났으며 실업가들을 찾아가 고개 숙여가며 기부금을 요청했다.

야구로 인도차이나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이만수 감독

이 감독은 라오스에서 스포츠를 통해 한 국가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했다.
“야구라는 단어가 없던 나라에 이젠 협회까지 생겼어요. 공산국가인 라오스 정부가 2년 동안 외면했지만,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게 스포츠라고 강조한 끝에 결국 지원을 약속받았죠.”

라오스에 야구협회를 만들고, 대표팀을 결성해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2020년에는 염원하던 야구장이 멋지게 완성되어 라오스 최초의 국제대회가 열렸다.

이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러 나라에 야구와 함께 복음이 들어가도록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 야구팬들에게 받은 사랑은 야구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 복 받은 사람"

“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일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라오스와 베트남의 열악한 환경에서 야구 선수를 키우고 우리나라 3군 정도 실력의 팀으로 만들었어요. 매년 한국에 초청해 친선대회도 열고 있어요. 팬들에게 큰사랑을 받았고, 한국 어디를 가도 환영받고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국제후원 활동이 가능했죠."

동남아에 야구를 전파하는 것은 메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금세 물이 증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감독은 끊임없이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렸다. 라오스와 베트남의 메마른 땅에 생소했던 야구가 자리 잡고 복음이 심어져 생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제 인생 끝까지 메마른 땅에 마중물 역할을 계속해서 반드시 결실을 맺고 싶습니다. 평생 야구 한길로 달려오며 남편과 아빠로서 부족함이 많아요. 사랑하는 가족과 며느리, 귀여운 손자를 돌보며 건강하게 노년을 맞이해야 하는데 여전히 야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달려갈 때 사랑하는 가족 또한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이 감독은 야구를 시작한 뒤 매일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그의 일기는 야구 일지이면서 그의 신앙의 행보가 기록된 믿음 일지이기도 하다. 그 일기의 한토막에 행복의 정의가 담겨 있다.

"야구 경기하다가 슬럼프가 와도 매일 일기를 썼어요. 50년이 넘었어요. 어린 시점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때가 너무 많아요. 지금도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 지르고 신나게 야구를 할 것만 같은데 어느새 60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어요.

야구로 인해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살 수 있어서, 저는 행복한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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